bon-gwan (본관, 本貫)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 / 天邦支竺馬骨皮)
http://bakong.tistory.com/137
정말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의 성씨일까?
잡학 사전/역사
2011/02/15 08:34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성(姓)인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와 천민 계급인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와의 혼돈에서 발생한 오류입니다.
상식적으로 천민은 성(姓)이 없는 신분이기에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가 천민의 성씨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조선시대에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의 몇 차례 혼란 속에 신분상승을 위해 돈으로 급조된 성이라 반박하는 이도 있지만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는 이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이 또한 설득력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씨의 경우 고려 초, 4대 임금인 광종에게 성을 하사받아(약 951년) 그 후로 고려 때에만 무려 36번의 최상급 벼슬(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한 명문 중의 명문가문이고요.
그렇다면, 천방지축마골피가 천하다는 얘기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 성씨와는 무관하게 7대 백정(白丁)을 한문으로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天은 무당
方은 목수나 미장이
는지관 등 요즘의 장의사
丑은 소백정
馬는 말백정
骨은 뼈(고리)백정
皮는 가죽백정(갖바치)
를 말하는 것입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전까지는 천민은 이들뿐만 아니라 관노비(官奴婢), 사노비(私奴婢), 소작농(小作農) 등이 더 있었으며 양민 대부분과 중인도 공식적으로는 성(姓)이 불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관청이 인정하는 성(姓)을 가졌다면 양반의 자손으로 군역(軍役)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양반가문의 족보는 관청에서 관리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군적관리가 강화되고 중인과 양민이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면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국가에서 이들을 공식문서인 족보로서 양반으로 인정할 필요 때문이지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까지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7대천민은 ‘동대문 밖 갖바치 돌쇠’, 농노(소작농)와사노비는 ‘김(주인의 姓)가네 개똥이’등과 같이 불렸습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전 국민이 성(姓)을 갖게 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호적이 정리되면서 천민들은 주인의 성(姓)을 쓰거나 직업과 발음이 비슷한 성(姓)으로 호적을 등록하여 공식적으로 전 국민이 성(姓)을 갖게 된 것이죠.
또한, 족보관리는 군역 등에 신분차별을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족보관리가 관청이 아닌 각 문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족보는 예를 들어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파 공주문중’일 경우 문중보(공주문중)는 10년 단위, 종파보(대종파)는 20년 단위, 파보(계림군파)는 30년 단위, 대종보(경주김씨)는 60년 단위로 만들게 되는데 일본강점기에는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한 검증이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특정성씨라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시대 족보는 본보(本譜)와 별보(別譜)로 구분하였으며 갑오경장 이전 족보에서 가계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별보라 했는데 별보의 분량이 본보의 몇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혼란했던 한국전쟁 이후 1955년부터 57년 사이에 족보 대부분이 다시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전쟁으로 없어진 족보와 친인척확인목적보다는 각 문중의 경제적 목적이 더 큰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 본보(本譜)와 별보(別譜)의 구분이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성(姓)을 갖게 되면서도 신분차별을 없앤 갑오경장(甲午更張)이전에 7대 천민을 비하하면서 부르던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가 발음이 비슷한 천방지추마갈피(千方池秋馬葛皮)로 와전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덧붙여 일부에서 양반이 아니라도 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기록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임꺽정이 임씨가 맞을까요? 실록에 임꺽정의 형은 가도치로 가씨로 나옵니다. 성이 아니라 산도적이니 林으로 임꺽정의 형은 갓받치였으니 "가"로 표기한 것입니다. <어떤오후>
[출처 : 네이버 지식in]
http://ask.nate.com/popup/print_qna.html?n=8792665
천방지축마골피가 정말 천민 성씨인가요?
kyongin119 | 08.12.12 15:08
답변 5
조회 6,576
네티즌공감
우리나라 성씨중에 천 방 지 축 마 골 피 라는 성은
천민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정말인가요????
태그천방지축마골피 마골피 천민성 이름 천민 계급
비공개 님의 답변
08.12.12 15:12
답변공감
조선초만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도 안되었는데 나머지 90%는 어디로 갔을까요 ?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끝세, 개똥이, 향단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 족보를 위조하거나,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상,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다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이박 등등"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명성씨가 더욱 흔해지게 된 것입니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것은 조선의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재 품성과 생김새가 천한데~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집의 돌쇠이였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으니, 그 사람의 품행으로 양천을 판단해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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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성씨라는 것은
일제의 1909년 민적법이란은 민족분열정책에 편승하여 흔한성씨로 위장할 수 있던 종놈들이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성씨 千方池秋馬高皮는 소수이지만 고려때부터 있던 귀한 양반성씨일 뿐입니다....조선말과 일제시대에 대다수 성씨도 없던 상,천민층들이 숨어도 들키지 않을만한 흔한 양반성씨로 호적을 신청해 가지면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양반들이 되었는데....혹 양반으로 숨어든 것이 들키기도 할까봐 비교적 숫자가 적은 양반가문이 천민이였다라는 역사왜곡의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례로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는 고려때부터 역사서에 기록된 명문가로써 36명 문화평장사, 전공판서 상원수 지용수장군, 충의군 지용기 장군,조선조는 병조참판 지여해, 충정절제사 지정, 도승지 지덕해,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장군 등 천년을 이어온 무반 명문세족으로 유명하구요. 태조대왕의 첫째사돈(진안대군 장인)은 찬성사 지윤, 인조대왕의 사돈(여동생 남편)은 한성판윤 지계최 로 충주지씨 였군요. 왕의 사돈이 천민이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또한 이순신 장군의 처가 방씨이고요. 장인은 방진으로 당시의 현감. 그리고 천씨의 중시조는 천만리 장군으로 화산군 책봉을 받았군요...((((이들의 공통점은 전부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지킨 호국충신들이지요))) 왜 이런 말이 일제시대에 생겼는지 잘 생각해 보시지요. ^^
* 상기성씨 주요인물
천만리 :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 화산군 책봉
방현령 : 조선후기 대사헌
지용수 : 고려의 일등공신, 충무공 시호
마천목 : 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피득창 : 조선의 개국공신 병조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성관별 과거급제자 찾아보세요.
천민은 과거에 응시조차 할수 없었으나 상기성씨들은 벼슬아치 및 고위관료들이 있는 귀한성씨일뿐이군요.
재미있는 점은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의 경우는 무반계열에서는 조선의 유명명문가문들(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등등) 보다도 인구비례대비 2~3배나 급제자가 많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지요.. 아마도 충주지씨의 무과급제자가 많은 사유는 천년간 이어온 호국충신의 전통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참고로 저는 꽤나 문반양반이라는 청송심씨이지만 ~ 흔한성씨로 숨어든 노비 백정 후손들이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가 "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성씨"라는 것이죠..^^
요새 돈잇음 양반이져^**
ㅎㅎㅎ
출처 : 네이버퍼옴
ek0801 님의 답변
08.12.12 15:20
답변공감
천민의 성이라고 알려진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라는 성들이 있는데요
하지만 그건 근거없는 속설입니다.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 혹은 천방지추마골피는
이들 성씨가 조선 시대의 천민 신분에 해당하거나,
천민들이 창성한 성씨라는 내용의 대한민국의 도시 전설입니다.
그 유래나 속설의 등장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제가 민족의
이간질을 위해 만들어 낸 루머라는등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등장
시기는 근대화 이후의 시기로 추정됩니다.
신빙성 없는 내용으로서 여러 차례 그 허구성이 지적되었으며, 대표적으로
1.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을 가질 수 없었다.
2. 천민이 창성 시, 기존의 대성(大姓) 대신 천민 신분을 드러낼 성을 선택했을 개연성이 낮다.
3. 속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사료가 없다.
4. 축씨나 골씨는 없다.
5. 고려, 조선 시대 역모에 휘말린 사람에게 역모 가담자라는 낙인을 위해 동물의 성이
부여되는 일이 있었으나, 모두 후대에 개성(改姓)되었다.
6.해당 성씨 중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 관직 등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예- 방(方/邦)현령 : 조선후기 대사헌
지(地/支)용수 : 고려의 일등공신, 충무공 시호
마(馬)천목 : 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피(皮)득창 : 조선의 개국공신 병조판서]
^-^ 이래도 천민의 성씨라고 할 수 있을까요?
출처 : 인조이 제팬
schindlerlist 님의 답변
08.12.13 16:48
답변공감
예전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것이 없죠.
신분제 사회도 아닌데ㅠㅠ
mgo5775 님의 답변
08.12.14 13:39
답변공감
그런데 굳이 지금과 같은 시대에 신분을 가릴 필요가 ??
이미 단일민족이란것도 사실상 거짓말로 들어난 지금 성씨에 의미가 ..
우리나라에 성씨대부분이 중국에 성씨가 와서 된것입니다.어떻게 아냐면 제가 마씨이기때문에 잘알죠.
마씨도 원랜 중국성씨입니다 그렇다고 중국과 우리나라가 옛부터 떨어진 성씨냐 ?그것도 아니올시요..
유전자적으로보자면 사실상 중국이니 한국이니 하는것 자체도 어불성설일수도..유전자적으로 역추적하면
결국은 하나에 민족 또는 여성에 의해 생긴 ...예전에 어느 유전학자분이 역추적했었던 뉴스가 생각나는군요.결국 인간은 인간일뿐이란 뜻이죵.그리고 더쇼킹한건 마씨족에서 유명한 도사가 있었다는 사실 후후..
출처 : 나에 생각과 공부
cjstksptl 님의 답변
답변채택왕 | 09.04.26 20:03
답변공감
천방지축(추)마골피 란?
" 한글만 알고 한자을 모르는 무식함에서 퍼진 속설입니다".....
天方地丑馬骨皮는 조선조 천대받던 직업을 지칭하는 말이였고,
千方池秋馬葛(高)皮는 고려때부터 있던 양반성씨입니다..
즉, 조선시대 천시받던 직업은 하늘천-天(무당업), (본뜰방)-方(목수업), (따지)-地(지관업), (소축/추할추)
丑(소백정업), (말마)-馬(말백정업), (뼈골)-骨(뼈백정업), (가죽피)-皮(가죽백정업)이란 뜻이며,
이들 업종에 종사하던 천민은 자신 직업의 한자를 자신의 호칭으로 쓰기도 하다가
1909년 일제의 민적법 시행시 주로 유명성이나 주인성을 호적으로 만들어 가졌습니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양반성씨의 호적을 준것은 조선의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고 합니다.
- 일례로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는 고려때부터 역사서에 기록된 명문가로써 36명의 문화평장사와
24대장군을 배출한 고려의 중앙귀족으로,
충무공 지용수장군, 정일품 벽상삼한삼중대광 지용기장군, 조선조 이조판서 지유용, 병조참판 지여해, 도승지 지덕해,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장군 등 천년 무인의 명문세족으로 유명하구요.-
태조대왕의 사돈(진안대군 장인)은 찬성사 지윤, 인조대왕의 사돈(여동생 남편)도
한성판윤 지계최 로써 연못지씨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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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성씨라는 것은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편승하여 흔한성씨로 위장할 수 있던 종놈들이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성씨 千方池秋馬皮는 소수이지만 고려때부터 있던 귀한 양반성씨일 뿐입니다....조선말과 일제시대에 대다수 성씨도 없던 상,천민층들이 숨어도 들키지 않을만한 흔한 양반성씨로 호적을 신청해 가지면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양반이 되었는데, 혹 양반으로 숨어든 것이 들키기도 할까봐 비교적 숫자가 적은 양반가문이 천민이였다라는 역사왜곡의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 상기성씨 주요인물
천만리 :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 화산군 책봉.
방현령 : 조선후기 대사헌
지용수 : 고려의 일등공신, 충무공 시호
마천목 : 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피득창 : 조선의 개국공신 병조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성관별 과거급제자 찾아보세요.
천민은 과거에 응시조차 할수 없었으나 상기성씨들은 벼슬아치 및 고위관료들이 있는 소수의 귀한성씨일뿐이군요.
재미있는 점은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의 경우는 무반계열에서는 조선의 유명 명문가문들(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등등) 보다도 인구비례대비 2~3배나 급제자가 많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지요.. 아마도 충주지씨의 무과급제자가 많은 사유는 천년간 이어온 호국충신의 전통 때문으로 사료되는 군요.
무지와 역사왜곡의 속설 시급히 개선해야 될 대한민국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http://ameblo.jp/sincerelee/entry-10602238822.html
天方地丑馬骨皮
2010-07-27 10:58:49
テーマ:雑記
昨日、私の巣(?)でもある某スレにて
姓による差別について教えて欲しいという内容の
質問を受けました。
儒教文化の韓国(朝鮮と言うべきですかね)で
姓氏による差別があったのは言わずと知れたことですが、
実は子供の頃から
「チョン・バン・ジ・チュク・マ・ゴル・ピ」の姓はサンノム(身分の低いな奴という意味)出身だという話を良く耳にしてきました。
チョン(千)、バン(方)、ジ(池)、マ(馬)、ピ(皮)は今でもちゃんと存在する姓氏です。
自分が知っていることを述べてから、ちょっと気になって
それ、本当かな?と調べてみましたが
意外な事実がわかりましたので、書いておきたいと思います。
サンノム(賎民)は姓によってその職業がほとんど決まっていて、いや言い換えれば職業によって姓が決まっていて、
チョン(天)氏は巫俗人(ムダンと言います)、
バン(方)氏は木で物を作る職業、
ジ(地)氏は葬儀をする人、
チュク(丑)氏は牛を殺すベクチョン、
マ(馬)氏は馬を殺すベクチョン、
ゴル(骨)氏は骨を扱うベクチョン、
ピ(皮)氏は皮職人(ガパッチ)のことでした。
実は賎民(身分の低い階級)には姓そのものがあまり意味がありませんでした。教育が出来ない(字を学んだりするとクーデターの罪を問われたりしました)状態だったためお父さんのやっている仕事をそのまま受け継ぐのが普通で、それにもしそうじゃなくても、その職業の人を「その姓氏で呼べば」それでよかったのです。
人間でない存在にちゃんとした姓など無用。
わかるように呼べればそれで良い、ということですね。
名字?そんなのあるわけありません。
しかし日本に併合されてから、状況が一変します。
日本はヤンバン(貴族)の姓に
この人達を「編入」させました。
天(チョン)氏は同じ発音を持つヤンバンの姓である「千」(チョン)氏へ、
方(バン)氏は同じ発音、同じ表記のヤンバンの姓である「方」(バン)氏へ、
地(ジ)氏は同じ発音を持つヤンバンの姓である「池」(ジ)氏へ、
丑(チュク)氏は発音が似ている「秋(チュ)」氏へ、
馬(マ)氏は同じ発音と表記の中国、朝鮮のヤンバン姓「馬(マ)」氏へ、
骨(ゴル)氏は発音が似ているヤンバン姓「葛」(ガル)や「高」(ゴ)氏へ、
皮(ピ)氏は表記と発音が同じのヤンバン姓である「皮」(ピ)氏へ
それぞれ編入することで、氏による差別をなくしたということですね。
それがいままで「チョンバンジチュクマゴルピはサンノムだ」という誤解を買っている、という説明でした。
賎民たちから見ると、救世主の福音みたいなものだったでしょうね。
これは私にも良い勉強になりました。
しかし朝鮮時代の身分差別・・・知れば知るほど嫌気がします・・・
http://www.qdata.co.kr/bo/bbs/board.php?bo_table=bbs&wr_id=1787&page=3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
글쓴이 : 소현 조회 : 379 추천 : 0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 또는 천방지추마골피 라는 성씨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때는 성씨 자체가 없었는데 위의 성씨가 천민이라는 근거가 없다
예을들어 이렇게 불리었다 방아간 뒷집 언년이 집에 아들이 있다.
또는 방아간 뒤집 언년이 옆집에 장쇠가 장가을 간다
이런식으로 불리웠다. 그러니 위의 성씨가 천민이라는 근거는 없을뿐더러..
천(天) 을 사용하는데 천민이 저한자를 사용할리가 만무하고
내 생각이지만 아마 타지역(중국)에서 넘어온사람들의 성씨가 아닌가 싶다
방세옥((方世玉) 중국의 무술가 성씨도 방세옥인걸 보니 중국성인것 같다.
중국도 내란이 심했으므로 피난을 오면서 성씨가 따라온것 같다..
어자피 우리의 뿌리는 중국 저쪽지역이니 전부 한가족이다..(한중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9116
Magolpy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 성씨?
"중국 유래, 개국공신 등 하사 받은 성 많아"
07.01.29 15:00l최종 업데이트 07.01.30 00:06l안홍기(ano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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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오후 <네이버> 실시간 인기검색어. 신인가수 '마골피'가 2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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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중순 '마골피'라는 가수가 등장한다는 소식이 29일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마골피'라는 검색어가 <네이버>, <다음> 등에서 인기검색어에 오르면서 네티즌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마골피'는 20대 초반 여성 솔로 가수로, 부르는 노래의 장르는 록발라드라고 한다. 장윤정의 '어머나', 이승철의 '서쪽 하늘' 등을 작사·작곡한 윤명선 프로듀서가 '마골피'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맡았다는 것과 '동방신기'의 믹키유천, '슈퍼쥬니어' 김희철·강인·신동이 마골피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다는 소식은 알려졌지만 얼굴은 공개되지 않아 많은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천방지축마골피 성씨 중국 유래, 임금 하사 많아" 그러나, '마골피'하면 뒤이어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흔히들 천·방·지·축·마·골·피 이 7개 성씨는 조선시대 천민들의 성씨라고 알려진 것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 현재 주변에 '천방지축마골피' 7개 성씨 중 하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조상을 천민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3만여권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 부천족보전문도서관의 김원준 관장은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단언했다. 천민은 성씨를 가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 성을 가진 사람의 조상은 천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왕조시대에는 민란 등 중죄를 일으킨 이에게 동물을 뜻하는 글자를 성씨로 부여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그 성이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죄인임을 뜻하는 성을 자손들이 잇지 않고 다른 성으로 바꿔버리기 때문. 김 관장은 "현재 '천방지축마골피'와 같이 희귀한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중국에서 넘어 와 정착한 이라든지 새 왕조를 여는데 공헌한 개국공신으로서 임금에게 새 성씨를 하사받은 이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어 "성씨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생겨났다가 하는 것"이라며 "족보가 대중화되는 시점부터 누가 양반이고 천민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http://blog.daum.net/nosookja/17061407
천방지축마골피 - 성씨 유래
중국 유래, 임금 하사 많아...
● 영양 천씨(千氏) 시조 : 천암
본래 중국 성씨로 시조 천암은 명나라초 조신을 지냈으며, 중시조인 충장공 천만리는 명나라 말 문과에 장원해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 오군수를 역임하고 임진왜란때 영량사겸 총독장으로 아들 천상, 천희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군량수송을 담당하였고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정유재란 때에도 직산,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하자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에 봉하고 화산군에 봉했습니다.
밀양, 여양, 연안, 우봉, 충주, 협천 등을 본관으로 하는 천씨(天氏)
유래 및 시조는 알 수 없으며, 문헌상 조선 정조조 진사시에 합격한 천명익이 확인됩니다.
● 온양 방씨(溫陽 方氏) 시조 : 방지(方智)
시조 방지는 중국 염제 신농씨의 13세손으로 전하는 방뢰의 134세손으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669년 나당동맹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와서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상주)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방운(方雲)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60여년 간 6대에 걸쳐 무공을 쌓아 중무장군과 대장군을 거쳐 좌승지, 지성사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에 이르렀습니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방운은 공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의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습니다. 후손들은 방지를 시조로 하고 방운을 1세조로 하고 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습니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한 뿌리이며 근래에는 온양으로 단일화되고 있습니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 시조 : 방계홍(房季弘)
중국 요 임금의 아들 단주의 후손이자 재상 방현령의 둘째아들인 방준은 고구려 보장왕의 주청으로 우리나라에 온 당의 8학사 중 한 사람으로 당성(남양)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고려시대에 삼한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보국공에 오른 방계홍을 시조로 하고 선조가 살았던 남양(南陽)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습니다.
방계홍의 아들 방의강(房儀康)은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서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으며, 손자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부사겸예부상서를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손자 방정유(房貞儒)는 수원방씨(水原房氏)의 시조입니다.
광주, 무안, 영흥, 예천, 철원, 파주 등을 본관으로 하는 방씨(邦氏)
유래와 시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보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인 방기창이 있습니다.
개성 방씨 시조 : 방두현
시조 방두현은 중국 주나라 방위장군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고려조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온 6시랑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개성에 정착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습니다.
태원 방씨 시조 : 방발
시조 방발은 중국 태원사람으로 관직은 지휘도총장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정착해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으로 태원으로 하였습니다.
● 충주 지씨(忠州 池氏) : 지경(池鏡)
시조는 선의공 지경으로 중국 송나라 홍농 사람으로 태학사로서 고려의 사신으로 왔다가 960년 귀화했으며,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평장사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지씨들은 모두 충주 지씨의 분파로 현재는 충주 지씨로 일원화되었습니다.
봉주(봉산) 지씨(鳳州 智氏) : 지채문(智蔡文)
시조 지채문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지제교(大提學知製敎)에 이르렀으며, 1010년(현종 1)에는 중장랑이 되어 거란족의 침입을 화주(和州)에서 격퇴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왕이 전주를 거쳐 나주까지 피난갈 때 호종한 공로가 인정되어 토지 30결을 하사받았으며 그 후 우상시가 되어 무관직을 겸직하였으며, 1026년(현종 17)에 우복야(右僕射)에 올랐습니다. 사후인 1032년(덕종 1)에 상장군좌복야(上將軍左僕射)에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추록되었습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봉주(봉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씨족통보』에 지씨(智氏)는 봉주, 괴주, 파주, 괴산, 제천, 보성, 밀양 등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는 봉주지씨 단본만이 존재합니다.
● 장흥 마씨 시조 : 마려(馬黎)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백제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온조왕의 10명의 신하 중 한 사람으로 비류·온조 형제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할 때 동행해 정착지를 선정할 때에는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하려는 비류를 말리는 한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할 것을 청하였고 백제건국 후에는 온조를 보좌하였던 인물입니다.
열산, 영평 마씨
마씨는 열산, 영평 2개의 본관이 전하나 모두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려 태조조 개국공신에 오른 마난이란 사람이 있는데 영평 마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때 명나라 제독으로 조선에 온 마관 장군의 증손자 마순상이 귀화하여 생긴 마씨도 있다고 합니다.
● 홍천 피씨(洪川 皮氏) 시조 : 피위종(皮謂宗)
시조 피위종은 송나라에서 금오위상장군을 지냈는데, 고려 정종조에 동국안렴사(東國按廉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여 병부시랑을 지내고, 좌사의대부로 추증되었습니다. 그의 후손 피인선(皮寅善)이 정당문학, 좌복야 등을 역임하고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피인선의 아우 피인고(皮寅古)로부터 단양피씨(丹陽皮氏)가 분적되었습니다.
괴산 피씨(槐山 皮氏) 시조 : 피경연(皮慶延)
시조 피경연은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피기광(皮起光), 호는 청피(靑陂)입니다. 『정미보(丁未譜)』에 의하면, 그는 금자광록대부로 신경위대장이 되어 남변을 정벌하였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고 합니다. 공민왕이 특별히 그를 괴산군(槐山君)으로 봉해주었으므로 그곳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의 5세손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전라감사(全羅監司)등을 지낸 피득창(皮得昌)을 시조로 삼기도 합니다. 괴산에 살면서 후손들이 홍천피씨에서 분관해 괴산을 본관으로 하였습니다.
"천,방,지,축,마,골,피 성씨 중국 유래, 임금 하사 많아"
그러나, '마골피'하면 뒤이어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흔히들 천·방·지·축·마·골·피 이 7개 성씨는 조선시대 천민들의 성씨라고 알려진 것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 현재 주변에 '천방지축마골피' 7개 성씨 중 하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조상을 천민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3만여권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 부천족보전문도서관의 김원준 관장은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단언했다. 천민은 성씨를 가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 성을 가진 사람의 조상은 천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왕조시대에는 민란 등 중죄를 일으킨 이에게 동물을 뜻하는 글자를 성씨로 부여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그 성이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죄인임을 뜻하는 성을 자손들이 잇지 않고 다른 성으로 바꿔버리기 때문.
김 관장은 "현재 '천방지축마골피'와 같이 희귀한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중국에서 넘어 와 정착한 이라든지 새 왕조를 여는데 공헌한 개국공신으로서 임금에게 새 성씨를 하사받은 이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어 "성씨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생겨났다가 하는 것"이라며 "족보가 대중화되는 시점부터 누가 양반이고 천민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 출처 : 기라성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 도시전설
2011/07/31 12:15
http://blog.naver.com/jogaewon/110114669317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 혹은 천방지추마골피는 이들 성씨가 조선 시대의 천민 신분에 해당하거나, 천민들이 창성한 성씨라는 내용의 대한민국의 도시 전설이다. 그 유래나 속설의 등장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제가 민족의 이간질을 위해 만들어 낸 루머라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등장 시기는 근대화 이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신빙성 없는 내용으로서 여러 차례 그 허구성이 지적되었으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천민은 아예 성을 쓸 수 없었다.[출처 필요]
- 천민이 새로 성을 얻게 될 때, 기존의 대성(大姓) 대신 천민 신분이 드러날 성을 선택할 까닭이 없다.
- 이 속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사료가 없다.
축씨나 골씨는 없다.
-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역모에 휘말린 사람에게 역모 가담자라는 일종의 낙인으로 동물의 성이 부여되는 일이 있었으나, 후대에 모두 일반성으로 바뀌었다.
- 해당 성씨 가운데 마천목과 같이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 관직 등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전근대 신분제의 잔재인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일본에서도 부라쿠민을 성으로 가려낼 수 있다는 비슷한 속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유대주의의 전통이 뿌리깊은 유럽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지배 아래 유대계 성씨와 비슷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오인받지 않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유대인이 생존때문에 성씨를 바꾸는 등의 일이 있었다.
한자가 동일한 성씨라고 하여도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고대 한반도에는 오랑캐 성이라고 하여 벽(僻)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들 성씨들은 고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흔한 성씨로 바뀌었다. 예을 들어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경주 김씨 김의(金義)을 야열가(也列哥)로 기록하고 있는데, 야(也)씨는 고대 벽성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성씨들은 대부분은 한자가 다른 동음이성이거나, 한자가 같으나 중국에서 넘어 온 성씨이다.
방(方), 방(邦)씨의 경우, 방(方)씨는 없어 졌고 방(邦)씨는 인구수 2~3명의 소수이다. 대부분의 방씨는 房, 龐인데 그들은 중국에서 동래했으므로 천민도 아니고, 천한 성이라는 인식을 피하여 성을 바꿀 이유는 없었다. 지(地), 지(支)씨는 없어 졌고, 지(池)씨의 경우는 중국 동래 성본과 신라 토착 성본 2가지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일부 성씨는 조선 후기 광해군조에 창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시대, 양반, 몰락한 양반의 인구수는 전체 인구 가운데 절반 이하였다. 병자호란 시대에 천민들이 돈을 주고 족보을 사서 새롭게 양반으로 편입하는 사례, 근현대에 천민들도 모두 성을 가지게 되므로 고대의 벽(僻)성, 또는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와 같은 성씨는 대부분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성이 없다가 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인구수가 많은 성씨에는 벽성들이 일부 존재한다.
[출처]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작성자 프리스트
http://blog.daum.net/kimhg8136/15199366
천방지축마골피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 혹은 천방지추마골피는 이들 성씨가 조선 시대의 천민 신분에 해당하거나, 천민들이 창성한 성씨라는 내용의 대한민국의 도시 전설이다. 그 유래나 속설의 등장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제가 민족의 이간질을 위해 만들어 낸 루머라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등장 시기는 근대화 이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신빙성 없는 내용으로서 여러 차례 그 허구성이 지적되었으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을 쓸 수 없었다.
천민이 창성 시, 기존의 대성(大姓) 대신 천민 신분을 드러낼 성을 선택했을 개연성이 낮다.
속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사료가 없다.
축씨나 골씨는 없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역모에 휘말린 사람에게 역모 가담자라는 낙인을 위해 동물의 성이 부여되는 일이 있었으나, 모두 후대에 개성되었다.
해당 성씨 중 마천목과 같이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 관직 등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전근대 신분제의 잔재인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일본에서도 부라쿠민을 성으로 가려낼 수 있다는 비슷한 속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유대주의의 전통이 뿌리깊은 유럽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서 유대계 성씨와 비슷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오인받지 않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유대인이 생존을 위해 성씨를 바꾸는 등의 일이 있었다.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는 다 천민?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는 다 천민인가?
천방-지축(天方地軸)
①못난 사람이 종작없이 덤벙이는 일.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다/내가 천 년을 살겠느냐, 만 년을 살겠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티를 못 벗고 매사에 천방지축이냐.≪최명희, 혼불≫/교당을 악명 높은 봉세관과 결탁시키는 둥 그 행각이 가히 천방지축이라는 소문이었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②너무 급하여 허둥지둥 함부로 날뜀. ¶천방지축으로 도망하다/고두쇠는 연거푸 대답을 하고 인제 제 목이 아니 떨어질것을 알아차리고 천방지축으로 아사달의 곁에 가서 동여맨 것을 끄르기 부산하였다.≪현진건, 무영탑≫
①못난 사람이 종작없이 덤벙이는 모양. ¶그전에는 천방지축 어린 나이였고 이제는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소녀였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②너무 급하여 허둥지둥 함부로 날뛰는 모양. ≒천방지방. ¶고갯길을 천방지축 달려 올라가자니 마음이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발인들 아프지 않았으랴.≪정비석,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천방지축은 이런 뜻입니다. 질문하신 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또 천방지축마골피가 아니라 천방지추마고피이구요... 이것을 #039;상놈 7성#039;이라고 하는데 전혀 근거없는 말입니다.
천,방,지,추,마,고,피 (천방지축마골피... 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 이건 근거없는 말입니다.
영양 천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로 명나라때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천암의 후손들입니다. 천수경이라는 훌륭한 시인도 계셨고 통훈대부, 광주부윤, 영월군수등의 벼슬을 대대로 해온 집안입니다.
방씨는 온양 방씨의 경우 당나라때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온 성씨로 조선조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분이 계셨습니다.
남양 방씨의 경우 당나라 양공 방현령이라는 분을 시조로 사간원 정언벼슬한 분이 계셨지요. 개성방씨는 한성좌윤을, 태원 방씨는 오위장 벼슬을 지낸 분이 계셨습니다.
(각 성씨에 조선조에 높은 벼슬하신 분의 벼슬이름만 꼽겠습니다.)
지씨 - 충주지씨(병조참판)
추씨 - 전주추씨(한성부윤)
마씨 - 목천마씨(장흥부원군)
고씨 - 제주고씨(너무 많다는군요.. -_-;;)
피씨 - 괴산피씨(병조판서) 홍천피씨(한림학사)
이로 미루어 본다면 위에 언급한 7성이 상민의 성씨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사실 이 성씨들의 특징은 희귀성이며, 대부분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성씨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런 속설이 퍼지게 된 것이지요. 또 다른 답변도 비슷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千方池秋葛(高)皮는 양반 姓입니다.
이들 姓이 兩班 姓인 것은 朝鮮氏族統譜를 통해 입증됩니다.
千方池秋葛(高)皮의 姓을 가진 분들 중에 역사상 開國功臣, 府院君 등 領議政급인 正1品을 지낸 분들이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姓은 양반이 아니면 가질 수 없으며 양반이 아니면 대과(문과시험)에 응시하거나 벼슬을 할 수 없었읍니다. 따라서 천방지추마갈(고)피가 천민의 姓이라는 말자체가 어폐가 있읍니다.
姓=兩班이었으므로 이들 姓이 천민姓이라면 그 姓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정姓에 대한 비하는 甲午更張이전에 30%에 불과했던 姓가진 사람이 甲午更張이후에 100%가 되면서 "똥묻은 개가 뭐묻은 개" 욕하는 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신의 양친의 조상중에 한 사람이라도 천민이면 천민이 되는 조선시대 논리라면 한국사람 모두가 모두가 천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외가집, 외할머니의 친정, 외할머니의 어머니의 친정.....
할머니의 친정, 할머니의 어머니의 친정, 할머니의 외할머니의 친정....
증조할머니의 친정, 증조할머니의 어머니의 친정,.....
이렇게 따져서 자신이 양반의 혈통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甲午更張이전까지 양반이 30%정도에 불과했는데...
따라서 천방지추마갈(고)피가 천민의 姓이라는 것은 姓=양반이므로 그 자체로서 어폐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비추워볼때 이를 따지는 것은 하늘보고 침뱉으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원래 天方地丑馬骨皮로서 특정 姓과는 무관하게 7대白丁을 한문으로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이들 7대백정은
天은 무당 ,
方은 목수나 미장이 ,
地는지관 등 요즘의 장의사 ,
丑은 소백정 ,
馬는 말백정 ,
骨은 뼈(고리)백정,
皮는 가죽백정(갓받치) 을 가르킵니다.
甲午更張이전까지는
천민은 이들뿐만 아니라
官奴婢,
私奴婢,
농노인 小作農 등이 더 있었으며
대부분의 양민과 중인도 공식적으로는 姓이 불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관청이 인정하는 姓을 가졌다면 양반의 자손으로 軍役(현대의 병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양반가문의 족보는 관청에서 관리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에 군적관리가 강화되고 중인과 양민이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면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국가에서 이들을 공식문서인 족보로서 양반으로 인정할 필요때문이지요.
甲午更張이전까지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7대천민은 ‘동대문밖 갓바치 돌쇠’, 농노(소작농)와사노비는 ‘김(주인의 姓)가네 개똥이’등과 같이 불리워졌습니다.
甲午更張으로 전국민이 姓을 갖게 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호적이 정리되면서 천민들은 주인의 姓을 쓰거나 직업과 발음이 비슷한 姓으로 호적을 등록하여 공식적으로 전국민이 姓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족보관리는 군역등에 신분차별을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족보관리가 관청이 아닌 각 문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족보는 예를들면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파 공주문중’일 경우 문중보(공주문중)는 10년단위, 종파보(대종파)는 20년단위, 파보(계림군파)는 30년단위, 대종보(경주김씨)는 60년단위로 만들게 되는데 일제시대에는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한 검증이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특정姓씨라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시대 족보는 本譜와 別譜로 구분하여 甲午更張以前族譜에서 가계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별보라 했는데 별보의 분량이 본보의 몇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였던 6.25이후 1955년부터 57년사이에 대부분의 족보가 다시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전쟁으로 없어진 족보와 친인척확인목적보다는 각 문중의 경제적 목적이 더 큰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 本譜와 別譜의 구분이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읍니다.
그 결과 甲午更張이전까지 1인당 평균 2명의 아들을 두다가 이때부터 갑자기 아들이 평균 5명이상으로 늘어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姓을 갖게 되면서도 신분차별을 없앤 甲午更張이전에 7대천민을 비하하면서 부르던 천방지축마골피가 발음이 비슷한 千方池秋馬葛皮로 와전된 것일 뿐 千方池秋馬葛皮가 賤民인 것과는 무관합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姓씨변천을 이해한다면 千方池秋馬葛皮 뿐만 아니라
모든 姓에 賤民등 기존의 姓이 없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에 사는 우리는 선진국들이 출신보다는 자수성가를 존중하듯이현재 자기 姓도 중요하지만 신종추원의 논리로 가까운 조상위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일부 분들이 양반이 아니라도 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기록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임꺽정이 임씨가 맞을까요? 실록에 임꺽정의 형은 가도치로 가씨로 나옵니다. 성이 아니라 산도적이니 林으로 임꺽정의 형은 갓받치였으니 가로 표기한 것입니다.
출처 : 사단법인)한국전례원 - 社團法人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메모 :
(mochi thinking)
i don't like to treat such a racist topic....
but studying the issue of so-called comfort women,imperial japan's crimes,the its connected with korean traditional caste problem.
although japan has same social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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