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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03, 2007
Professor Lee Young-hoon
"Korean violent nationalism forces out of historical controversy"
- Chosun Ilbo -
Korean historical consciousness has some ideological and moral, it tends to want to confront with a person who has different views.
also our political leaders are seemed to think that the Republic of Korea had been founded by some mistake.
Kim Dae-jung administration had launched the founded the second committee,President Roh Moo-hyun defined that the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as the time of "justice defeated, opportunism had been rife", it is obviously.
the wrong historical consciousness would be divided the nation and society, difficult to entering developed countries for South Korea.
professor (Lee Young Hoon) (56)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opened his mouth again through his book of "The story of South Korea" will be published this week (Kiparan books), he wrote in the introduction as follows,
"i used to censor by myself when writing from some time.
But true censor is but Korean nationalist violence.
who have been done it, in addition to forced him retirement,apology,to escape or nothing"
professor (Lee Young Hoon) was "student" spent only in the university.
the professor had appeared to TV debate in 2004, he had gotten the barrage of public opinions.
because of him issued "we should pursue the responsibly of Korean civilians who helped to mobilize the comfort women", but it was communicated as if he claimed "sexual slavery for Japanese military was a form of state-regulated prostitution" .
4.19革命(サイルグヒョクミョン、4·19혁명)、4.19(サイルグ、사일구)とも言う。また、革命後一年足らずで朴正煕少将らによる軍事クーデター(5・16軍事クーデター)が発生して、自由が抑圧された長い軍政時代に突入したため未完の革命(ミワネヒョンミョン、미완의 혁명)とも呼ばれている。
moreover,he was grabbed on the seminar for "alternative textbook" of Korean modern history which held by "Korean textbook forum" in last December by a member of the honor organization of April 19 revolution [President Syngman Lee,
had a dictatorship,he had been fallen down by civilians demo dissatisfied with the results of the fraud election,in 1960]
2007年06月03日
李栄薫教授「韓国の暴力的民族主義が歴史論争を封殺」--チョーセン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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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人の歴史意識は観念的かつ道徳的であり、見解の異なる者との対立を自ら望む傾向にある。また政治指導者らは、大韓民国が何かの間違いで建国された国だと考えているようだ。金大中(キム・デジュン)政権が第2建国委員会を発足させたことや、盧武鉉(ノ・ムヒョン)大統領が韓国近現代史を“正義が敗北し、機会主義がはびこった”時代と規定したことだけを見てもそれは明らかだ。こうした間違った歴史意識は社会や国家を分裂させ、韓国の先進国入りを難しくしている」
ソウル大経済学部の李栄薫(イ・ヨンフン)教授(56)は、今週出版される『大韓民国の話』(キパラン出版社)を通じて再び口を開き、序文にこう記した。
「いつからか文章を書く際に自分で検閲をするようになった。だが、真の検閲者は韓国の暴力的民族主義だ。これにやられた人は、謝罪や引退、または逃亡に追い込まれるほかない」
李栄薫教授は大学の中だけで過ごしてきた「書生」だった。その教授が2004年にテレビ討論に出演したところ、世論の集中砲火を浴びた。「慰安婦動員に協力した(韓国人の)民間人らの責任も追及すべき」と主張したつもりが、「日本軍性奴隷は公娼制度の一形態だった」と主張したかのように伝えられたためだ。
また昨年12月に「教科書フォーラム」が開催した韓国近現代史「代案教科書」セミナーでは、4・19革命(1960年に不正選挙の結果を不服とした民衆デモにより、当時独裁体制を敷いていた李承晩〈イ・スンマン〉大統領が下野した事件)顕彰団体の会員らに胸ぐらをつかまれたこともあった。
だが、なぜ李栄薫教授は、こうした屈辱を受けながらも再び立ち上がったのだろうか。28日午後、記者は教授の元を訪れ、その理由を尋ねてみたところ、教授は「昨年初めに出版された『解放前後史の再認識』の編集にかかわりながら、韓国社会の中産層がこれまでの50年間、民族や民衆、階級などといった日常生活とは何の関係もない歴史からどれだけ苦しめられたのかを痛感した。そこで、こうした状況を何とかしたいと思い、自由と信頼、法治の文明精神に基づいて書かれた新たな歴史を示そうと考えたことがきっかけになった」と答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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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ヒト、いわゆる知日派で(というか、割と普通のアタマを持っているヒト)、少し前に従軍慰安婦問題に異を唱えた。
文中にもあるが、
>その教授が2004年にテレビ討論に出演したところ、世論の集中砲火を浴びた。「慰安婦動員に協力した(韓国人の)民間人らの責任も追及すべき」と主張したつもりが、「日本軍性奴隷は公娼制度の一形態だった」と主張したかのように伝えられたためだ。
マスコミの(笑)策略にはまり、結局「自称 強制連行された元慰安婦のおばあさん」たちに土下座をさせられ、なんとか学会からの追放を逃れた。
この李栄薫教授のシリーズは4部あって、次の記事はこちら。
>李栄薫教授「韓国人の儒教原理主義が歴史を歪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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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うして今回出版される『大韓民国の話』は、朝鮮の滅亡、日帝による収奪、親日派、慰安婦、大韓民国の建国、反民特委(反民族行為特別調査委員会)など、民族主義と関係するデリケートな論点を正面から取り上げている。その骨組みとなったのは、脱民族主義の視点から『解放前後史の認識』を批判、克服しようとした『解放前後史の再認識』(チェクサラン)だ。
そして李栄薫(イ・ヨンフン)教授は、韓国の指導者らが韓国の近現代史に否定的な歴史認識を持つ背景として性理学(儒教の一派。朝鮮王朝では絶対的権威を誇った)の思想的影響を挙げた。
「性理学は一種の原理主義哲学であり、あらゆるものの因果関係を一つの要因で説明しようとする。その典型的な例が、“これまでの60年間、韓国政治が混乱を極め、社会が腐敗したのは、親日派を清算できなかったため”という主張だ。こうした原理主義的思考に陥っている知識人らが社会の摩擦と対立をさらに激しくしている」
—(問い)-- それは、21世紀の韓国人が19世紀の性理学的名分論にとらわれているという意味か。
「韓国人は自ら伝統を否定し、批判した経験がない。韓国の伝統を批判した日帝が敗亡し、それにより伝統自体が美化され、産業化の始まりとともに民族主義的に利用された。性理学は、人間を道徳的存在と見なし、社会を道徳原理が支配する場と見なしている。これは、西洋的意味での実用主義や経験主義、多元化された思考とはかけ離れている。ここ数年間、韓国社会が深刻な摩擦と対立を経験したのも、余りに観念的かつ道徳的な性理学的思考からもたらされたものではないかと思う」
—(問い)-- 韓国史学界では、朝鮮王朝が滅亡したのは「凶暴な盗賊」(日本)のせいであり、「善良な主人(朝鮮王朝)」のせいではないと主張している。李栄薫教授はこうした歴史認識に対し、「歴史から何も学ぼうとしない無責任な姿勢」と批判しているが。
「朝鮮王朝は19世紀には既に事実上解体されていた。人口の増加により火田民(焼き畑農業を行う農民)が増えたため山林は荒廃し、少し雨が降っただけでも土砂が田畑に押し寄せ、農業生産力は減少した。18世紀中ごろに比べ、農業生産力は19世紀末にはほぼ3分の1の水準にまで衰退した。こうした農業生産力の衰退の影響で1850年代以降にコメ価格が暴騰し、それが政治的・社会的混乱へとつながり、それに対し朝鮮王朝は何ら有効な対策を打ち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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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うはっきり言っちゃうと、チョーセンでは居場所がなくなっちゃうんではないかと(笑)思ったりもする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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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年06月03日
李栄薫教授「厳格なジャッジなき学界が歴史を歪曲」--チョーセン日報--
前編はこち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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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で李栄薫教授は、『大韓民国の話』の中で、「“土地調査事業により全国土の40%が日本のものになった”“食糧の半分を日本に強制的に持ち去った”というのは、何ら根拠のない話」と主張している。
—(問い)-- 日帝が土地調査事業で土地を収奪し、食糧を強制的に奪ったというのは事実ではないのか。
「1982 年、金海郡庁で土地調査事業当時に作成された文書が大量に発見された。そこで、この資料を活用した研究を行ったところ、総督府は国有地を巡る紛争を公正に扱っていたことが分かった。全国484万町歩(1町歩は約0.99ヘクタール)の国有地のうち、12万7000町歩だけが国有地として残ったが、その大部分は朝鮮人農民らに有利な条件で払い下げられていた。食糧を日本に搬出したのも市場を通じた商行為に基づくものであり、強奪したわけではない」
—(問い)-- それならば、なぜ日帝が土地調査事業の過程で全国土の大部分を強奪したとされているのか。
「韓国の学界には厳格なジャッジがいないためだ。先進社会では学界を支配する厳格な審査グループがあり、主張の妥当性について判定を下している。後進社会にはこうした審査を行うグループが存在しないため、何が正しく何が間違っているのかについて、大衆はもちろん、研究者さえも知ることができない状況に陥っている」
—(問い)-- 日帝時代を扱った小説『アリラン』を「憤怒の念と狂気で満たされた作品」と批判したが、350万部も売れたベストセラーに対し、余りにひどい評価ではないだろうか。
「土地や食糧の収奪、虐殺など、この作品が描いた内容は事実とかけ離れている。自分も学校の図書館でこの本を借りて読んだことがあるが、本には学生らがあちこちに書き込んだメモが残されていた。例えば、日本人の巡査が土地調査事業を妨害したという理由で、朝鮮人農民を裁判にもかけずに処刑する場面では、“ああ、こんなことがあってよいのか…”と怒りを示していた。このように商業化された民族主義が横行し、被害意識だけが膨れ上がった結果、(植民地支配を実際に体験した)高齢者よりも若い世代で反日感情が強くなった。これは、商業化された民族主義と間違った近現代史教科書に基づく公教育のせい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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いやーw、相変わらず香ばしいチョーセン日報様の質問攻撃w
いやいや、これがチョーセン国民の声なのだなww
んで、最後の章。
>李栄薫教授「北朝鮮は日本帝国主義の申し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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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い)-- 386世代(1990年代に30歳代で80年代に大学に通った60年代生まれの世代)をはじめ、若年層では大韓民国の建国を否定的に考える人々が依然として少なくないが。
「建国とともにこの地に初めて自由民主主義国家が樹立され、個人の財産権や経済活動の自由を保障する自由市場経済体制が導入された。これは、韓国史の大転換と呼ぶべき出来事だ。だが、若年層が大韓民国の建国を否定的に考えるのは、われわれが近代に無賃乗車した側面が強く、自由民主主義社会を実現するための闘争をほとんどせず、市場経済を受け入れる際の代価を支払うこともなかったためだ」
—(問い) 高校の近現代史教科書や『解放前後史の認識』は、解放後に親日派らが建国に参加し、親日派を清算できなかったことが南北の分断をもたらしたと主張しているが。
「李光洙(イ・グァンス)や崔南善(チェ・ナムソン)のようなイデオロギー型の親日協力者らは建国の過程で排除されている。建国に参加した人々は、官僚、教師、会社員、銀行員などのテクノクラートであり、近代国家を建設しようとすれば、近代が要求する知識・技術体系を習得した人々が必要になる。(彼らを親日派と見なすのではなく)植民地体制下の近代を通じ、こうした近代国家の建設に必要な人的資源が供給されたと見るべきだ」
—(問い)-- 親日派を清算できなかったのは事実ではないのか。
「“われわれの力で解放を勝ち取れず、親日派を清算できなかったことにより歴史が歪曲(わいきょく)された”というイデオロギーが左派により広められているが、自らの力だけで植民地から解放された国がどこにあるというのだろうか。また、左派は“北朝鮮は親日派を清算した”と主張するが、本当にそうだろうか。天皇制イデオロギーに基づく日本軍国主義を継承した国家がまさに北朝鮮の首領体制ではないだろうか」
「木村光彦教授の著書『北朝鮮の軍事工業化』を読んで知ったことだが、金日成(キム・イルソン)主席が南侵を決行する上で、日帝が建設した軍事工業施設が一役買っていたそうだ。800人にも及ぶ日本人技術者らが韓国戦争(朝鮮戦争)の直前まで北朝鮮に抑留され、工業生産の復旧に当たっていた。北朝鮮経済が1960年代まで韓国に先んじていたのも、日帝が建設した生産基盤のおかげだ。金日成主席の北朝鮮は、精神・物質の両面で日本帝国主義の申し子ということができ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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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w
素晴らしいw
何がすばらしいといって、この悪意に満ちたチョーセン日報の質問攻めw
あまりまっとうなことや、本当のことを言うと干されますよ(笑)。
ムダですw
http://old.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39&article_id=570
[논평] 이영훈 교수는 과연 친일 극우파인가?
2004.9.10.금요일
딴지 논설우원
토론 프로그램에서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가 했다는 망언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해당 학과 홈페이지 게시판에 비난의 글이 쇄도하고 총장 앞으로 교수직을 해임시키라는 투서까지 날아든다고 한다. 그야말로 온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는 양상이다.
필자는 토론이 있던 당일 초저녁부터 잠을 자고 있었다. 당연히 토론을 실시간으로 보지 못했고, 다음날 흥분해서 이영훈 교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 틈에서 ‘아, 웬 극우 학자 한 명이 토론이 나와서 삽질했나 보다.’하고 무심히 넘기고 말았다. 그러던 중 토론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의 전문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토론 전문을 읽던 필자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영훈 교수의 발언에서 하등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던 시점이라 필자는 이상하다는 생각만 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의 해명서가 나왔다. 필자는 해명서를 읽으며 이영훈 교수의 과거사 규명 인식에 대해서 비교적 명확하게 감을 잡을 수 있었고, 당금의 전국민적 분노 현상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토론을 직접 보고 그 생각이 대충 맞다는 확신이 들어 지금 이 글을 쓰게 되었고 말이다.
필자는 이영훈 교수가 개인적으로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현 정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따위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토론의 발언 내용과 해명서의 내용을 기초하여 판단하건대, 그는 결코‘수구 꼴통’이라는 한 마디로 매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자가 보기에 토론 당시 의견은 세 개로 갈려 있었다. 첫 번째는 현재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방식으로 과거사를 규명하자는 쪽, 두 번째는 정부 차원에서의 규명에 앞서 학계가 주도가 되어 사회 일반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게 순서라는 쪽, 세 번째는 표면상 두 번째 의견을 살짝 뒤집어 쓴 채 가능하면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가자는 쪽. 당시 토론을 보신 분들이라면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필자는 이영훈 교수가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보며, 조선일보의 우종창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일단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종군 위안부=상업적 성격의 공창제’발언은 이영훈 교수가 언급한 적이 없음을 짚고 넘어가자. 이영훈 교수는 역사청산에 있어서 사회의 자발적인 참여와 고백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법률에 의해 경계 지우기를 하면 자칫 나머지 사람들을 역사의 원죄로부터 면죄시키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 대안으로 종군 위안소를 이용했던 일본 병사들의 생생한 자기 반성적 증언이 담긴 일본의 자료를 예로 들었다. 종군 위안소를 이용했던 조선인 병사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을진대 어째서 한국에서는 그들의 증언과 자기 반성의 소리가 없느냐는 이야기다. 그는 이 문제를 한국 전쟁 당시 한국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던 종군 위안부, 미군을 위한 합법적 위안부의 존재까지 연계시키며 이를 적극적으로 환기시키지 못하는 역사가들에게 비판을 가했다.
요지인즉 이영훈 교수는 성노예 범죄가 끔찍한 반인륜적 행위라는 인식을 토대로, 현재 역사가들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대중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여론 형성에 힘써야함에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이 주장은 그 날 토론에서 가장 빛났던 부분이었으며,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조선일보류 극우 숭미 집단이 어떻게‘한국전쟁시 남한 정부에 의해 운용되었던 위안부’와‘정부에 의해 합법적으로 운용되는 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끄집어내며 비판을 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건 우종창이나 조갑제 같은 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우종창의 머릿속엔 ‘이 새끼 빨갱이인가?’하는 생각이 스쳤을 거다.
그런데 그 때 ‘이영훈 죽일놈 사건’의 시발이 된 송영길 의원의 결정적인 한 방이 터져버린 거다. 그 전문을 읽어보자.
송영길 "지적할 게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의 문제와 지금 미군부대의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우익이 지금도 주장하는 것은 정신대가 총독부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종의 공창의 형태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미 증거자료에 의해 정신대는 조선총독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종의 성적 노예 상태에 놓인 것으로 근본적으로 (미군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아, 필자는 인터넷 다시보기를 통해 이 장면을 보면서 절망의 신음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송영길 의원이 잘못짚어도 한 참 잘못짚었다.
이영훈 교수는 일제시기 성노예 범죄에 대해 명확한 비판의 입장이며, 사회 일반에서 이 문제가 철저하게 반성되지 않았기에 한국 전쟁시 국가 권력에 의한 위안부 운영이 되풀이 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미군을 위한 위안부의 형태로 변형되어 이어졌다는 입장이다. 일본군의 성노예 범죄의 본질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남아 있고 당연히 이를 털어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위안부 문제를 미군 부대 성매매 문제와 함께 논했다는 표피적인 이유만으로 그는 이영훈 교수를 일본 극우파로 몰아버리는 결정적 오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뒤엔 토론이 완전 난장판이 되어버렸다.‘이 자식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하며 황당해하는 이영훈 교수와‘에라이, 일본 극우파 똘마니’라는 인식을 가진 송영길 의원 측이 서로 말을 잘라가며 오해를 풀 기회를 날려먹은 것이다. 심지어 노회찬 의원마저 송영길 의원의 인식에 동조하면서 이영훈 교수는 하릴없이 일본 극우파 꼬봉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번 사태를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세상이 언제나 흑과 백의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는 것이 아님에도 그런 구분에의 강요를 통해 진실이 왜곡되는 전형적인 모습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영훈 교수는 우종창의 옆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당시 토론장의 자리 배치가 1:1이 아니라 1:1:1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실상 이영훈 교수의 입장은‘과거사 청산’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정부가 주도’하는 과거사 청산이라는‘방법’을 문제삼은 것이며, 실제로 과거사 청산 작업 자체가 껄끄럽지만 차마 하지 말자고는 말 못하는 조선일보 우종창이 이영훈 교수의 논리에 빈대붙었을 뿐이다. 둘의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햇볕 정책하자는 김대중을 친북 빨갱이라 부르는 조갑제식 논리와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는가.
필자는 본지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정부가 추진하는 과거사 규명 추진에 당연 찬성하는 입장이다. 수 십년을 표류하다가 너무나 힘들게 잡은 기회이기에, 이 기회를 십분 살려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회 일반 차원에서의 대중들의 자발적 고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일제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적극 협력했던 일부의 친일파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과연 당시 일반 대중들은 그저 순결한 피해자였을 뿐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기준으로‘악’인 것이‘악’으로 인식되지 않던 시기, 지금의 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기, 대중은 흔히 그 시기의 기준과 가치에 매몰되곤 한다. 성노예 범죄는 머리에 뿔달린 악마가 저지른 악행이 아니다. 죄의식 없이 일제의 정책을 적극 찬동했던 조선인들이 있었고, 전쟁터에 끌려가는 피해자의 입장이면서 동시에 성노예들을 유린하는 데 동참했던 조선인 병사들도 있었다.
이영훈 교수의 말마따라 드러나는 친일파 몇 명 밝혀내고 처단한다고 해서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파시즘을 비판하고, 사고와 행동 하나 하나에 남아 있는 과거의 잔재를 떨쳐버릴 때 비로소 역사는 청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잘 진행되기를 바란다. 한편으로 정부에 의해 주도되는 과거 청산의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들의 의견도 잘 수렴되어 사회 전방위적인 청산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딴지 논설우원
칸막이( khanmagi@yahoo.co.kr )
http://yeoksa.blog.fc2.com/blog-category-42.html
http://nestofpnix.egloos.com/1253324
뭐, 기존의 통설에 대한 이의 제기 자체야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알려져 있던 피해자 수치는 뒷받침할 증거자료가 부족하다는 결점을 안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에는 패전 후 가능한 모든 공문서를 소각해버린 일본의 탓이 큽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일본 영토에 들어가기까지 근 보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이는 일본 정부 및 군, 기타 주도세력이 온갖 기밀자료를 파기하고 숨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일부야 남았겠지만 제대로 찾아낼 수가 없었죠. 일부 찾아낸 물량은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저 수치에 관한 명확한 근거자료가 있을 수 없고, 좀 과장된 게 아니냐 정도 소리는 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숫자를 둘러싸고는 연구자들 간에 구구한 추측과 주장이 있지만, 일본군 수뇌가 병사 1백50명에 1명의 위안부를 충원하라는 지령을 내린 적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 총 2백80만 정도의 일본군에 대략 2만의 위안부가, 병사 50명에 1명 꼴이었다 쳐도 대략 6만 정도로 추정된다"
=> 하, 이 인간은 전선이 확대되고 병력이 팽창하면서 위안부 수요도 급증했다는 사실은 잊고 있는 모양입니다. 종전시 남아있던 일본군의 숫자는 대략 본토에 235만, 만주 및 조선에 100만, 중국에 100만, 남양 제도에 320만 가량이었습니다(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근 750만이나 되는 저 숫자에서 150명에 1명이라고 해도 5만 명, 자기가 인정한 대로 50명에 1명이라고 하면 15만 명입니다. 전쟁 후기에 본토 병력이 급팽창한 사실을 감안해서 일정 부분 줄여서 잡는다고 쳐도 2만이나 6만이라는 수치는 도저히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저 놈은 위안부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안소가 공식적으로 처음 설치된 게 37년이고 조선 여자들이 끌려가기 시작한 건 그보다 한참 이전인 20년대부터입니다. 29년에 끌려가 5년간 성노예 노릇을 하다가 1933년에 탈출한 여성의 증언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정식으로 위안소가 설치된 이후만 따져보기로 하죠.
남경대학살을 계기로 위안소가 처음 세워진게 1937년인데, 저놈 주장에 따르면 그 이후로 위안부를 안 끌어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7년에 끌고간 위안부로 8년간 유지했단 말입니까? 한 번 전선으로 보내진 위안부가 전쟁이 끝날때까지 말짱하게 살아서 "유지"가 됐다구요? 아니, 전쟁중에 병력도 소모되고 탄약도 소모되고 식량도 소모되고 장비도 소모되는데 위안부는 소모도 안됩니까? 당연히 소모됩니다. 병걸려 죽고, 칼맞아 죽고, 총맞아 죽고, 무수히 죽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위안소를 탈출하기도 했죠. 탈출하다 잡히면 죽는거 뻔히 알면서요.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빈자리 생깁니다. 당연히 새로 데려온 위안부로 메꿉니다. 이걸 위안부가 군수품으로 취급됐다는 일본군 수뇌부의 입장에서 표현해보죠.
"넌 소모된 군수품 보충도 안하냐?"
물론 위안부 전부가 조선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중국인이나 필리핀인도 있었고 네덜란드인이나 영국인,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인종이 얼마나 동원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군 병사들이나 검진을 맡았던 군의관들도 80~90%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 미친놈이 말한 수치는 절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 위안부 중 조선인이 2만이었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전체 위안부 숫자를 2만이라고 주장한 셈이니까 말이지요. 기가 막힐 뿐입니다.
"20만이라는 숫자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1969년 국내 모 일간지에서 1943년과 1945년 사이 '정신대로 동원된 조선과 일본 여성은 전부 대략 20만으로서 그 가운데 조선 여성은 5~7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언급하면서부터였는데, 이를 1984년 송건호 등이 '일제가 정신대의 명목으로 연행한 조선인 여성은 어느 기록에 의하면 20만이고 그 가운데 5~7만이 위안부로 충원되었다'고 뜻을 달리 인용하면서 잘못 알려진 것"이라며 "이 때까지만 해도 20만이라는 숫자는 위안부가 아닌 군수 공장 등으로 동원된 근로 여성을 가리키는 정신대의 수였는데, 1984년 이후에 그것이 조선 여자 총수로 바뀌었던 것"
=>미안하지만 60, 70년대에 나온 서적에서도 수를 저렇게 줄여잡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일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수를 합쳐 20만 가량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저 중에는 위안부가 되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당시 16~21세의 조선 여자가 1백25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 여자 위안부가 '수십만' 또는 '20만'이나 됐다는 설은 (더욱더) 믿기 힘들다"
=> 위안부로 끌려간 여자들의 나이는 최하 11세에서 20대 후반, 30대 초까지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과연 125만밖에 안 되는지 궁금하군요. 잘나신 통계숫자 신봉자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강제 동원된 남자가 6백50만 또는 8백40만이었다는 주장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생겨난 것"이라며 "재일 사학자 박경식이 1965년 '1939~1945년간 일본으로 징용된 자가 1백만, 조선 국내에서 동원자가 4백50만, 군인ㆍ군속이 37만, 도합 약 6백만 명이 강제 동원됐다"고 쓴 것이 40년간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면서 남한에서는 6백50만으로, 북한에서는 8백40만으로 부풀려졌다.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1940년 국세 조사에 의하면 당시 20~40세의 조선인 남자의 총수는 3백21만이었는데, 그 나이의 남자들을 모조리 다 끌고 가도 반을 채울 수 없는 숫자가 교과서에서 가르쳐지고 있고 또 국제회의에서 거론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
=> 이에 관한 한일문제연구소측의 수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국내 노무 동원 410만∼480여만 명
해외 노무 동원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 등) : 150여만 명
군관계 동원(위안부 포함) : 최소 60여만 명
- 노동력 강제동원 150여만 명(해외)
석탄광산 약 60만, 금속광산 약 15만, 군수공장 약 40만, 토건관계 약 30만, 항만운수관계 약 5만 등
- 군관계 강제동원 603,385명
1938∼1943년 육군특별지원병 약 17,000명
1944년 징병(제1기) 약 210,000명
학도지원병 4,385명
해군특별지원병 및 해군 약 22,000명
군속(군관계 징용) 약 150,000명
여자근로정신대 및 군위안부 약 200,000명
여기서 저 미친놈이 무시하고 있는 사항.
첫째, 분명 이 수치는 "여자"를 포함합니다. 20만의 정신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연령대를 지나치게 좁게 잡고 있습니다. 20세가 되지 않은 조선 남자들 상당수가 군대에 들어갔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지요.
1. 육군특별지원병 :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면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 17세 이상, 신장 160㎝ 이상의 소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조선인 남자에게 육군특별지원병 지원 자격을 부여하고,선발된 자들을 훈련시켜 군대에 배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3년까지 1만7664명의 조선인이 일본군대로 동원됐지요. 과연 20세 이상자만 지원했을까요?
2. 소년지원병 : 소학교 졸업 이상의 만 14∼18세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징병에 앞서 황군의 일원이 되는 길”이라고 해서 모집해 관련 군학교에 입교시켰습니다.
또한 노무자는 40세 이하의 남자만 동원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국내에서 각종 공사에 동원된 경우 40세 이상자나 여자도 얼마든지 동원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 수치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 놈이
"국내에서는 한 번 동원된 사람이라고 해서 다시 동원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해외로 나간 사람이야 다시 돌아왔다가 재출국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비교적 정확한 수치라 볼 수 있지만 국내 동원은 실제 총원이라기보다 연인원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게 옳다고 본다"
는 정도의 소리를 했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건 그나마 말이 되는 추론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정녕 즐, 즐, 즐일 뿐입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지난 40년간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했다고 가르쳐 온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며 "그 숫자는 1967년 어느 무책임한 역사학자가 아무렇게나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 그럼 몇 퍼센트가 정확한지 왜 얘기 못하는지 묻고 싶군요. 그리고 그 수탈의 기준이 뭔지도요. 토지조사령을 어겼다고 총독부가 몰수한 땅은 토지소유제도를 근대화하고자 하는 시책에 협조하지 않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때문에 합법적으로 몰수된 땅이니 수탈이 아닐 테고, 고리대금에 몰려 헐값에 뺐긴 땅도 개인적인 채무관계를 잘못하여 넘어간 땅이니 합법적인 사거래에 해당하는 땅이라 수탈이 아니라고 할 테지요? 저 교수새끼 수업듣는 학생들은 저 뉴스 보면서 뭐라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이영훈, 일제시대, 징용, 징병, 정신대, 지원병
# by 슈타인호프 | 2005/04/28 00:03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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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안모군 at 2005/04/28 01:04
언제나 그렇지만, 합법의 틀이라는 것에 도취되면 참으로 곤란할 수 밖에 없죠. 법은 지키라 있는 거지만, 악법은 깨부수어야 마땅한 거라. 도로용지니 철도용지니 하면서 불하 내지는 강제수용 한 땅을 오늘날 기준으로는 임의 형질변경해서 분양한다던가, 선변 내지 로변이라는 이유로 노동착취를 한다던가 하는 케이스도 합법 범주로 나눌려나요.
연인원 개념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하는 논자를 두고 논리를 논할라니 참...
통계를 논할 때는 통계의 출처와 신빙성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는 법이죠. 북한의 통계를 아무도 안믿듯이, 일제 당시의 통계가 가공의 절차 없이 쓸 수 있는 것인지, 해석의 여지가 남는 것은 아닌지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런지.
뭐 아일랜드 대기근을 보는 눈도 저럴려나요. 저 양반.
Commented by 觀鷄者 at 2005/04/28 10:10
통계와 자료에 근거해서 연구하는 태도는 환영해야죠. 하지만 자료부터 자신의 논리에 맞춰 왜곡하면 말마따나 '니마 매너염~'이죠-_-+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5/04/28 12:51
안모군//아마 아일랜드 대기근도 아일랜드인들 스스로가 병충해 방제를 제대로 못한 탓에 일어난 사건이라 주장할 것 같군요.
관계자//맞습니다. 저 교수 정말 즐!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5/05/28 23:16
이 글, 디코/근대전사란에도 올리셨으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최준혁님이라는 이영훈만큼이나 숫자맹신자인 사람의 반응이 궁금하거든요.-_-;;;;;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5/05/29 09:53
덕부신//안 올릴 생각입니다. 저 스스로도 확실한 근거 없이 남들이 연구한 걸 바탕으로 해서 간단한 추론을 한 것 뿐인데 마치 제가 연구한 것처럼 그런데 내놓을 수는 없죠.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5/05/30 08:25
슈타인호프님의 의사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면, 이영훈 교수의 발언에 대해서 반론을 하신 분의 블로그가 있는데, 틈이 나시면 한 번 가셔 읽어 보시라고 제가 님의 인터넷이름이랑 여기 주소를 디코/근대전사란에 올리는 것은 허락하여 주시겠는지요?
슈타인호프님은 간단한 추론을 한 것이라고 겸양을 하십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매우 훌륭한 글이어서요.
(아마 전문적인 연구자의 논문도 저 정도로 잘 나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저 글보다 못한 본인의 글도 잘만 올리는데......ㅠ_ㅠ)
Commented by 소마 at 2005/05/30 09:40
이 분 또 이러시네요.왜 저걸 언론에 얘기할까요. 그렇게 역사가들도 모르는 문제를 자신이 알고 있어 그리 답답했다면 한일역사문제연구소같은 곳에 가서 싸우고 오면 될텐데. 뭔 말을 하든지 상관은 없지만, 무슨 뜻으로 저따구 말을 하는지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나 무식하오라고 하는거라면 KIN)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5/05/30 11:00
덕부신//그건 더 싫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만든 블로그도 아니고 디코에서 쓰는 이름가지고 만들었으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전 여기를 철저한 개인공간으로 만들고 싶지 싸움판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블로그 공개하느니 디코에 직접 올리는 편이 낫습니다.
어차피 이 이슈는 이미 한물 간 상탭니다. 냄비도 식었는데 굳이 거기에다 올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나중에 저런 소리가 또 나오거든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소마//답답할 따름이죠-_-;;
Commented by Hyperion at 2005/05/30 14:25
나이만 점잖게 처잡수셨다고 다 어른은 아닌게죠...-_-+ 미친 놈 아냐 저거?
Commented by minz at 2005/05/30 16:02
문제는 과정이 있건 말건
한명 이상이라는 거 아닐까요?
규모가 크던 작던 저런 행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5/05/30 20
http://www.eastasia.co.kr/196
[인물] 경제의 얼굴을 한 역사---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6/11/30 22:29 / People
민족의 아픔(?)을 안고 쓰러지시는 이영훈 교수님...."올해의 포토"(출처 한겨레)
매우 안쓰러운 얘기이긴 한데...바로 엊그제 사건인 '교과서 포럼'사건에 대해서 한 말씀 안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상황 못보신 분은 오마이TV에 가시면 생생한 실황 중계를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요즘 노통 때문에 우울한 가운데 저런 사건이 터져서 기분이 더욱 더 우울했습니다. 동영상으로 확인해 보니 가관이더군요. 말 그래도 육두문자와 유혈이 낭자한 올해 최대의 퍼포먼스였습니다.
11월 30일은 뉴라이트의 이론적 3대 거목이신---이영훈/안병직/유영익 교수님들이, 그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깡패와 시정잡배' 할아버님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혀진 날이 되겠습니다. 몇몇 선배들과 낄낄 거리면서 대화의 안주거리로 삼긴 했는데 기분이 그리 유쾌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밤 집에 와서는, 이영훈 교수의 '국사로부터 해방'이라는 글을 프린트 해서 정독했더랬습니다. 왜 이 같은 비극이 우리 사회에서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해서 성찰을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현재 뉴라이트운동, 교과서포럼 등 대안적 우파의 '이데올로그'를 자처(?) 하고 계시는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님. 눈치가 빠른 분들이라면 그가 했던 역사적인 망언(?)들을 기억하고 있을 지 모른다. 예를 들어 '위안부는 없다' '가짜위안부론' '위안부 창녀론' 등등... 그는 우리나라에 몇 아돼는 극우 확신범이다.>
저는 올해 4월에, 이영훈 교수님과 통성명을 하면서 제대로 인사를 하게 됐습니다. 자유주의 연대가 주최한 한 세미나였는데요, 그 모임의 열혈당원인 절친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따라간 자리였습니다. 뒤풀이에 함께 갔더랬는데, 자유주의 연대에 속한 분들이 이영훈 교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극진하더군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의 내용보다도, 이미 이영훈 교수는, 이 뉴라이트 진영의 어른으로 자리를 잡으신 겁니다.
동영상으로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런 폭력이 난무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의연하게 외치시는 기개가 있으신 분입니다. "당신들이 깡패야~" 그리고 직접 멱살을 잡으시고 한판 붙으시더군요. 놀랬습니다. 저는 지금 반어법을 쓰는 게 아닙니다. 혹시나 저런 상황에 처한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글쟁이라면 깨갱~ 하고 뒤로 숨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찌됐건 한판 붙으신 점만으로도 충분하게 한 집단의 어른으로 대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학사이시자, 선비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가지 더. 저는 정확하게 말하면 2002년 여름에, 이영훈 교수님의 글을 편집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 교수께서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글을 편집하면서 통화를 하기도 했고, 메일을 주고 받기도 하면서, 그의 생각을 조금은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세미나에서 멀치감치 떨어져 눈으로만 확인하고 말았습니다만. 어찌됐건 그때만 해도 약간은 순박한 경제사 학자였던 그는,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차츰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경제사 교수에서, 대한민국의 미래와 오늘까지도 재단하고 싶어 하는 한 명의 이데올로그가 된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4.18 학생운동론. 혹은 5.16 혁명론이 중요한게 아니고, 이영훈 교수란 연구를 단순하게 비판할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게 오늘의 주제가 돼겠습니다.
혹시나, 그 분이 전하는 메시지를 직접 접하지 않고, 좌파언론이 전달하는 제목만 본 사람이면 "이영훈 저 새끼 똘아이 아냐?"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당연합니다. 그의 주장은 일견 참으로 역겹습니다. 여기서 일일히 제목을 거론하기는 머하지만, 그는 일본의 극우파를 쉽게 떠올릴만큼 극단적(?)이 십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제일의 경제사 연구자입니다. 그는 나이 40세까지, 우리나라의 경제사를 가장 체계적으로 공부한 최고의 대가입니다. 우리나라 근세경제를 원자료까지 들춰가면서 연구한 분은 사실 몇 안됩니다.
그가 말하는 주장이 허무맹랑해 보일 수는 있어도 논리까지 허무맹랑하게 튀어나온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고스톱 쳐서 서울대 교수가 된 것이 아니었겠지요.
감히 대 학자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우나, 정리를 할 수 있다면 "근대화에 대한 감사"라고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때문에 이 교수 같은 분들에게는 박정희가 고마운 것이고, 그리고 더욱 더 일본이 고마운 것입니다. 때문에 그의 경제사에 대한 연구는 결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체제론으로 발전을 하게 되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해양세력과 함께"라는 논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의 과격한 역사 해석은 극우논리와 맞물리면서 수 많은 추종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님만 해도 이영훈 교수의 주장과 거의 흡사한 주장을 펼치시기 때문에, 저도 흠칫 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조선왕조가 민중들 밥이나 제대로 먹였을 것 같아? ------ 따지고 보면 일제시대 한국사람은 다 친일파였어, 다들 창씨개명 하고 부역했는데 ---- 박정희가 큰 일 한거지, 지금이 단군 이래로 가장 잘 살 때라니까---"
이영훈 교수는 과격하다기 보다는, 어찌보면 너무나 솔직한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경제사를 되짚고 올라가보니 결국은 한국의 근세사라는 게 비참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러한 미개한 경제 체제위에 놓여진 정신세계라는 것도 허접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나아가 남한의 현대사 역시도 미국-일본으로 이어지는 세계체제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겠죠. 때문에, 이 분들은 노무현류가 주장하는 "한국의 역사는 정의가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는 해석에 절대 동의하지 못하고 새로운 사회운동, 이른바 교과서 개혁 운동에 까지 나서게 된 것일지 모릅니다.
참고 : 주간한국 2003년 9월22일 (작가 복거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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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을 묻는 분이 계시다면, 저도 흠칫 하고 놀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1. 한 사회, 국가의 역사는 경제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꿈이라는 것도 있고 이상이라는 것도 있는데요. 그가 현재 유통되는 대한민국의 국사를 "민족주의 관점으로 짜여진 상상의 거푸집"이라고 폄훼하지만, 그 역시도 역사를 오로지 경제적 관점으로만 파악하는 동굴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 지 모를 일입니다.
2. 무엇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뉴라이트 학자 3인방들은 아주 큰 경험을 했을 것 같습니다. 4.19 희생자들의 유가족들과 동지들이 오롯이 살아있는 현실에서, 저런 심한 발언을 학술적 발언이라고 지껄이다니요. 아무래도 뉴라이트 3인방의 무모함에 놀래고 말았습니다. 요는---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역시 말을 조심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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