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露戦争の取材の為、朝鮮を通る事になったアメリカ人記者が釜山で両替した時の写真。
奥地では銅銭しか通用しないので両替の必要があった
in 1904, a stunned American, exchanged $ 150 to coin.
the photo that an American reporter to coverage of the Russo-Japanese War, who had exchanged in Busan to go through Korea .
There was a need for currency exchange to coin, because not working in the outback.
1904년, 150달러분을 동전에 환전해서 벙벙하는 미국인
일러전쟁의 취재 때문에, 조선을 통하게 된 미국인기자가 부산(釜山)에서 환전했을 때의 사진.
두메산골에서는 동전밖에 통용되지 않으므로 환전의 필요가 있었다
Robert Lee Dunn in Seoul, February 1904
http://yeoksa.blog.fc2.com/blog-entry-550.html
1904년 부산.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 150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기념촬영.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이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 동전은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던 기자가 사용할 취재경비였다. 던은 한국 화폐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일본인 통역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다. 저녁 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 더미를 보고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했다. (Collier's Weekly, 1904.6.4)
http://era-tsushin.at.webry.info/200906/article_18.html
to validate Joseon Korea from one photograph [1904]
an American reporter to be stunned exchanging $150 of travel funds to coin in 1904.
he tried to go to interview in the inland, because it was hardship to exchange in the inland to change money, so he was exchanged together in a money exchange shop. Like a bunches of network on his foot were bunch of coins.
the one Photo will tell us that the variety of really.
1, Joseon Korea has been said various things, on this time, the small money was able to be in circulation at least. then money exchange shop could accumulate much money, ensure private ownership.
[the effect that Ito Hirobumi effort assisting Joseon in Korean Peninsula?
2, at the same time, we can see the fact that recasting {base coinage} to be bad money by clan of queen Min was very serious level, there was not existed of
money in large denominations distribution that highly convenient in market substantially.
[Issue money and credit was based on the creditworthiness of Joseon dynasty
3, on this after, he hired a horse master for transporting the money, but he was run away with his money by the horse master. at least, as far as from this picture, have not be seemed such as shoplifting, robbery come to steal.
i don't know the photo was taken in either Seoul or Busan, seen that the public safety during the day was present at a constant level.
[Effective as a protectorate by Japan?
it was in 1904 when this photo was taken , was two years after since 1902, the massacre of the Barangika in Philippines by U.S. military, [the victims estimated 20 million ],and the four years before the case that American Ambassador Stevens was assasined by Korean "so-called Martyr" Chang In-fan and Chon Myon-un, paid a large sum of money 200,000 yen (ryo) by Japanese government held out for Korean Peninsula as not to be revenged nor massacred.
一枚の写真から検証する李氏朝鮮【1904年】
<< 作成日時 : 2009/06/04 13:51 >>
1904年旅行資金150ドルを、銅銭に交換して呆然とするアメリカ人記者。内陸に取材にいこうとしたところ、内陸では貨幣の交換ができないために、両替屋でまとめて両替したのだそうです。足元の網の束みたいなものが銅銭の束になります。
この一枚の写真は本当にさまざまなことを我々に教えてくれます。
一、李氏朝鮮はいろいろなことを言われていますが、少なくともこの当時、少額貨幣は流通していたこと。そして両替屋はこれだけの貨幣を蓄積できるだけの【私的所有権を確保】できていたことになります。
【伊藤博文公が、朝鮮半島の李氏を補佐効果?】
二、同時に、閔妃の出身部族 閔一族の改鋳【悪貨化】は、非常に深刻な水準であり、利便性の高い市中流通高額貨幣は、実質的に存在しなかった、という事実が見受けられます。
【貨幣発行と信用は、李氏の信用力に基づく】
三、彼はこの後、貨幣運搬用に馬子を雇い、その馬子にカネを持ち逃げされるのですが、少なくとも、この写真を見る限り、盗みにくる強盗・かっぱらいなどはいないようです。
この写真がソウルか釜山のものかはしりませんが、日中の治安は一定レベル存在していたことが見受けられます。
【日本による保護領としての効果?】
この写真が撮られた1904年というのは、1902年、アメリカ軍によるフィリピン・バランギカの大虐殺【被害者推定20万人】の二年後、そしてアメリカ全権大使スチーブンスが、韓国の『いわゆる義士』 張仁煥と田明雲らに暗殺され、彼らが起こした報復としての朝鮮半島が大虐殺されないために日本政府が差し出した20万円【20万両】という大金を支払った事件の四年前となります。
【・・・・ほっといて、アメリカに朝鮮人を根絶やしにさせればよかったのに、と、時々思っているのは残念ながら、ホンネです。日本国民を徹底的に虐待搾取し、あんな恩を仇で返す害虫民族をなんで繁殖させたんだか・・・・いや、答えはしってます。しかし、検証すればするほど、かの民族に対する嫌悪感と汚猥感はいやますばかりなだけです】
1장의 사진으로부터 검증하는 이(李)씨 조선 【1904년】 <<작성 일시:2009/06/0413:51>>
1904년 여행 자금 150달러를, 동전에 교환해서 벙벙하는 미국인기자. 내륙에 취재에 가자로 한 바, 내륙에서는 화폐의 교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환전상에서 정리해서 환전한 것이다고 합니다. 발밑의 그물의 다발(속) 같은 것이 동전의 다발(속)이 됩니다.
이 1장의 사진은 정말로 각양각색인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1, 이(李)씨 조선은 여러가지 일들을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이 당시, 소액화폐는 유통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환전상은 이것만의 화폐를 축적 될 수 있는한의 【개인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공이, 한반도(朝鮮半島)의 이(李)씨를 보좌 효과? 】
2, 동시에, 민비의 출신부족 민(閔) 일족의 개주 【악화화】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며, 편리성이 높은 시중유통 고액화폐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은,이라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화폐발행이라고 신용은, 이(李)씨의 신용력에 근거한다】
3, 그는 이 다음, 화폐운반용으로 마부를 고용하고, 그 마부에게 돈을 가지고 달아남되는 것입니다만, 적어도, 이 사진을 보는 한, 도둑질에 이르는 강도·날치기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이 서울인가 부산(釜山)의 아랑곳 없이 모르겠습니다만, 일중(하루 중)의 치안은 일정 수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 의한 보호령으로서의 효과? 】
이 사진이 찍어진 1904년이라고 하는 것은, 1902년, 미군에 의한 필리핀·【바란기카】의 대학살 【피해자추정20만명】의 2년후,그리고 미국 전권대사【스치분스】가, 한국의 『소위 의사』장인환이라고 전명운들에게 암살되어, 그들이 일으킨 보복으로서의 한반도(朝鮮半島)가 대학살되지 않기 위해서 일본정부가 내민 20만엔 【20만량】이라고 하는 거금을 지불한 사건의 4년 전이 됩니다.
【·… 내버려두고, 미국에 조선인을 근절시키면 좋았는데도,라고, 때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혼네】입니다. 일본 국민을 절처하게 학대 착취하고, 저런 배은망덕하는 해충민족을 왜 번식시킨 것일인가 ·… 아니, 대답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검증하면 한 만큼, 저 민족에게 대한 혐오감과 汚猥감은 점점 많아질 뿐인 것 만큼】
http://blog.goo.ne.jp/think_pod/e/f65004bd941036e1226a0f7bb9c072e7
イザベラ・バード 93-94頁 南漢江(なむはんがん)旅行に際して
http://www5b.biglobe.ne.jp/~korea-su/korea-su/jkorea/nikkan/heigouji-chousen.html
イザベラ・バード 93-94頁 南漢江(なむはんがん)旅行に際して
「通貨に関する問題は、当時朝鮮国内を旅行するものを例外なく悩ませ、旅程を大きく左右した。
日本の円や銭はソウルと条約港でしか通用しない。
銀行や両替商は旅行先のどこにも一軒としてなく、しかも受け取って貰える貨幣は、当時公称3200枚で1ドルに相当する穴あき銭以外になかった。
この貨幣は数百枚単位で縄に通してあり、数えるのも運ぶのも厄介だったが、なければないで又それも厄介なのである。
100円分の穴あき銭を運ぶのに6人の男か、朝鮮馬1頭がいる。
たった10ポンドなのにである。」
The difficulty about money which then beset every traveller in the interior cost a good deal of anxious planning. The Japanese yen and its subdivisions were only current in Seoul and the treaty ports, there were no bankers or money-changers anywhere, and the only coin accepted was the cash, of which at that time 3200 nominally went to the dollar. This coin is strung in hundreds on straw strings, and the counting of it, and the carrying of it, and the being without it, are all a nuisance. It takes six men or one pony to carry 100 yen in cash, £10!
이자베라·버드93-94페이지 남한강(南漢江)(なむ은 암)여행에 즈음해서
http://www5b. biglobe. ne. jp/∼korea-su/korea-su/jkorea/nikkan/heigouji-chousen. html
「통화에 관한 문제는, 당시 조선 국내를 여행하는 것을 예외없이 괴롭히고, 여정을 크게 좌우했다. 일본의 엔이나 전은 서울과 조약항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다. 은행이나 환전상은 여행처의 어디에도 집 한 채로서 있지 않고, 게다가 받아 주시는 화폐는, 당시 공칭 3200장으로 1달러에 상당하는 구멍 텅 비어 있음 전이외에 없었다. 이 화폐는 몇백장단위로 줄에 통과시켜 있어, 세는 것도 나르는 것도 성가셨지만, 없으면 잔잔해져서 또 그것도 성가신 것이다. 100엔분의 구멍 텅 비어 있음 전을 진척시키는데도 6명의 남자인가, 조선 말 1마리가 있다. 단 10파운드인데도 나와 있다. 」
이자베라·버드93-94페이지 남한강(南漢江)(なむ은 암)여행에 즈음해
「통화에 관한 문제는, 당시 조선 국내를 여행하는 것을 예외없이 괴롭히고, 여정을 크게 좌우했다.
일본의 엔이나 전은 서울과 조약항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다.
은행이나 환전상은 여행처의 어디에도 집 한 채로서 있지 않고, 게다가 받아 주시는 화폐는, 당시 공칭 3200장으로 1달러에 상당하는 구멍 텅 비어 있음 전이외에 없었다.
이 화폐는 몇백장단위로 줄에 통과시켜 있어, 세는 것도 나르는 것도 성가셨지만, 없으면 잔잔해져서 또 그것도 성가신 것이다.
100엔분의 구멍 텅 비어 있음 전을 진척시키는데도 6명의 남자인가, 조선 말 1마리가 있다.
단 10파운드인데도 나와 있다. 」
493 名前:<丶`∀´>(´・ω・`)(`ハ´ )さん[] 投稿日:2012/03/07(水) 19:43:11.88 ID:/Hl6SKTm [3/6]
>>489
貨幣はあったけど、粗悪過ぎて超インフレ状態だったと記憶。
(少し両替しただけで、荷馬に積まなきゃどうにもならんほどの量の穴あき銭になってたはず)
there was money in korea,but i remember that it was was too inferior money, state of hyperinflation.
Just exchanged a little bit of money, it would had been about the amount of hole coins (sen) necessary to pile up on the wagon)
496 名前:<丶`∀´>(´・ω・`)(`ハ´ )さん[] 投稿日:2012/03/07(水) 19:44:25.61 ID:snnxcrMb [8/9]
>>493
だったら基本的に物々交換だよね
then they did basically barter.
499 名前:<丶`∀´>(´・ω・`)(`ハ´ )さん[sage] 投稿日:2012/03/07(水) 19:44:54.82 ID:nptqwiOI [2/2]
>>493
粗悪というか、貨幣経済が崩壊してたって事だね。
Or rather inferior money, what was that money economy had collapsed.
501 名前:Ta152 H-0 ◆Tank/Ja2RQ [sage] 投稿日:2012/03/07(水) 19:45:25.33 ID:7WNMeR7Q [10/14]
>>493
で、綿貨(綿布を通貨の代わりにする)が主流でした。
so cotton money (instead of currency money) was common currency.
509 名前:Ta152 H-0 ◆Tank/Ja2RQ [sage] 投稿日:2012/03/07(水) 19:52:18.42 ID:7WNMeR7Q [11/14]
>>508
李朝が農本主義で商業を軽視する傾向があったと言うことだけが事実。
the fact that i can only say that Joseon dynasty was agricultural fundamentalism, they were tendency to downplay commercial business.
510 名前:朝鮮狗[] 投稿日:2012/03/07(水) 19:53:47.02 ID:sWkn+fbh [16/24]
朝鮮人は銅も採掘できないから
銅を日本から輸入した。対馬の宗氏のもうけ。理由は悪銭をつくるため。
いわゆる偽かね。
Koreans could not mining even copper.
korean had imported copper from Japan.
So clan in Tsushima got whole of profit. The reason for making easy money.
so-called false money.
511 名前:エラ通信[] 投稿日:2012/03/07(水) 19:54:12.15 ID:CfnqS5v8 [6/21]
>>493
一ヶ月分の取材費100ドルを両替したら、こんな大量の銅貨になってしまい、
途方にくれるアメリカ人の図ってのがあったね。
この後、馬子を雇ったら、馬子に持ち逃げされましたww
512 名前:朝鮮狗[] 投稿日:2012/03/07(水) 19:58:02.62 ID:sWkn+fbh [17/24]
農本主義、、、ご冗談を。
朝鮮は完璧な奴隷社会でした。おまちがえないよう。
だから農業は全く発展しなかった。わかるでしょ?朝鮮には米に関わる文化
は皆無、雑穀のみ、、野原でとれるから。
水田が無かった事は、、いろいろな旅行記に出てる。
513 名前:エラ通信[] 投稿日:2012/03/07(水) 19:58:16.04 ID:CfnqS5v8 [7/21]
>>507
一か月分の滞在取材費。
1904年当時は、ある程度の専門技能を持つ事務員の週給が3ドル~4ドル
$150 was the coverage costs for one month's stay.
At that time in 1904, US$ 3~4 dollars for clerk who has expertise for a weekly salary.
514 名前:<丶`∀´>(´・ω・`)(`ハ´ )さん[] 投稿日:2012/03/07(水) 19:58:22.74 ID:954qr4Q8 [1/12]
>>507
150ドルは150円です。(貿易銀貨)
1円を現代の感覚を基準に価値を考えると、4000円ぐらい。
つまり明治の150円は現代の60万円ぐらいかと思います。
$150 was value as 150 yen. (Silver trade)
relative to the sense of the modern, 1 yen was valued as about 4,000 yen.
i think that 150 yen in Meiji era was valued as modern 600,000 yen. ($7000)
515 名前:朝鮮狗[] 投稿日:2012/03/07(水) 20:00:46.01 ID:sWkn+fbh [18/24]
馬の話で面白いのは、、
朝鮮に馬はいなかった。
いたのは超小型のラバの類。
What's interesting story of the horse,
there was no horse in Korea.
there was just kind of small mules.
521 名前:<丶`∀´>(´・ω・`)(`ハ´ )さん[] 投稿日:2012/03/07(水) 20:08:53.55 ID:954qr4Q8 [3/12]
まぁ、なんだ。
李朝鮮の貨幣経済はあったことはあったが、崩壊しており物々交換がメインであった。
とか。
そもそも「商業」というものが「基本的に行商だけ」であった。
とか。
その価値が崩壊している貨幣を農民がちょっとためこむと両班が強制借金を申し込んだ。
とか。
there was currency economy in Joseon korea, but it had been collapsed, the barter was main way.
or called "commercial" was "basically just peddling".
the coins which collapsed the value,if farmer earn a little money, Yangban forced debt them.
526 名前:エラ通信[] 投稿日:2012/03/07(水) 20:16:08.99 ID:CfnqS5v8 [8/21]
>>518
それです。
ここより内陸には、両替商はないよ、と教えられ、
じゃあ両替しておこう、
とやったら、銀貨・金貨は流通していないので
全部銅貨になっちゃいましたww
that's right.
he was taught that there was not any moneychanger from here to inland, OK,Well let me exchange,and he did,
there was no gold or silver coins on distribution, turned away them all copper coins.lol
562 名前:エラ通信[] 投稿日:2012/03/07(水) 20:40:34.70 ID:CfnqS5v8 [15/21]
>>552
店舗構えるとね、略奪されたり、家人をさらわれたりするんだ。
両班に。
そして、身代金持ってこないと、足を折られたり、目をくりぬかれたり。
こうされなかったところって、個人でヤクザっぽい奉公人抱えてたトコだけ。
その意味でも、ほとんどが行商なんよ。
if he sets up his store, he would be looted in his house or kidnapped.
by Yangban.
if he can't bring ransom,he would be folded his legs, or torn out his eyes.
What not this way, only can be employed gangster as personal servant.
In that sense, almost they trade by peddling.
http://d.hatena.ne.jp/perushaneko/20081009/1223507080
hitkot|10-07 01:00
( ´H`)y-~~ このスパゲッティのような物体は何ですか?www
what is this object such as spaghetti?
ppsh43|10-07 01:17
Ψ( `∀´ )Ψ 昔、重量計算をしたんだが、たしか2ドル程度で人力運搬の限界を超えたような(30kg)
因みにこの数字、両替レートや重量等は最低での計算だから、実際はもっと増えますw。
→100kg|10-07 01:20
Long time ago, i calculated the weight , certainly about $ 2 (30kg) would be beyond the limits of human power transportation.
actually would be more increased.
日本の江戸時代の一両って、今で言えば50万円札って感じかな。米換算の物価で言えば10万円ぐらいだろうが、国民一人当たりのGDP規模で考えれば、今よりずっと低い水準だからね。それでも、流通の基軸として無くてはならない貨幣だったけど。まあ、朝鮮は本当に原始時代だな。w
→
as 1 Ryo (a gold coin) in Edo period of Japan, i think what bills as 500,000 yen ($6250) now.
it is about 100,000 yen ($1250) in terms of speaking in rice prices, given on a scale as per capita GDP, because the levels was much lower than now.
still, currency coins were the cornerstone of distribution.
Well, Joseon era was really in primitive age.
→
tiburon|10-07 01:20
日本は米で租税とってたけど、朝鮮は何でとっていたんだろうか?
tax was taken as rice in Japan, i wonder what they took by something in Korea?
→ ppsh43|10-07 01:22
Ψ( `∀´ )Ψ日本なら見逃される、粟と稗ニカ? 秀吉の朝鮮征伐の時に、ゾセンの蔵の中身を調べたら、85%が米以外の雑穀だったらしいが・・・。 玄米にいたっては、1,5%・・・。
the millet that was not considered as tax in Japan?
at the time of the conquest of Korea by Hideyoshi, they checked the contents in Korean warehouses, 85% was cereals other than rice, brown rice was 1,5% only.
tiburon|10-07 01:30
後ろにいる人も見物している。洋服を着ている金持らしい人だ。これだけみても両替するということが日常でなかったことがわかる。
prozokukoku|10-07 01:42
イザベラバードの証言だと1ドル3200枚、3200×150=480000 ・・・48万枚orz
→
cl6328beta|10-07 01:49
海産物の取引かと思いますた......。
i mistook that it was some of the seafoods trade..
blue_blue_blue|10-07 01:08
イザベラ・バードの「朝鮮紀行」の中にも似たような記述があったな。両替したらとてつもない量の銭の束になったと…
→
100kg|10-07 01:09
南の島の巨大な石貨と同じ感覚ですね。w
Ψ( `∀´ )Ψ因みに、後日談があって、流石に持っていけないので、ゾセン人を雇って、預かってもらっていたら、”””全て持ち逃げ”” されたらしいw。 ( ´_ゝ`)b
the sense is like as a giant stone money in Southern island.
Incidentally ,there is a sequel story, he hired Korean because he couldn't bring it, then korean horse master run away with money.
→ koba2005|10-07 01:05
後日談は知らなかったが、プッですね
lol
→ erokap|10-07 01:06
壁|`)コレを持ち運んだ奴も凄いな
493명전: <⊙`∀´>(´·ω·`) (`【하】´)さ [] 투고일:2012/03/07(수)19:43:11.88 ID:/Hl6SKTm [3/6]>> 489화폐는 있었지만, 지나치게 조악해서 초인플레 상태이었다라고 기억.
(조금 환전하는것만으로, 짐말에 쌓지 않으면 어떻게도 안될 만큼의 양의 구멍 싫증나 이익이 남는고 있었을 것)
496명전: <⊙`∀´>(´·ω·`) (`【하】´)さ [] 투고일:2012/03/07(수)19:44:25.61 ID:snnxcrMb [8/9]>> 493이라면 기본적으로 물물교환이에요
499명전: <⊙`∀´>(´·ω·`) (`【하】´) 떠나다 [sage]투고일:2012/03/07(수)19:44:54.82 ID:nptqwiOI [2/2]>> 493조악이라고 할 것인가, 화폐경제가 붕괴되어서 굳이 것이네요.
501명전:Ta152 H-0◆Tank/Ja2RQ [sage]투고일:2012/03/07(수)19:45:25.33 ID:7WNMeR7Q [10/14]>> 493로, 면貨(무명을 통화의 대신으로 한다)이 주류이었습니다.
509명전:Ta152 H-0◆Tank/Ja2RQ [sage]투고일:2012/03/07(수)19:52:18.42 ID:7WNMeR7Q [11/14]>> 508이조가 농본주의로 상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할 말만이 사실.
510명전:조선狗 [] 투고일:2012/03/07(수)19:53:47.02 ID:sWkn+fbh [16/24]조선인은 구리도 채굴할 수 없기 때문에 구리를 일본에서 수입했다. 쓰시마(對馬)의 소(宗)씨의 벌이. 이유는 부정하게 얻은돈을 만들기 위해서.
소위 가짜인가.
511명전:아기미 통신 [] 투고일:2012/03/07(수) 19:54:12.15 ID:CfnqS5V8 [6/21]>> 4931개월분의 취재비용 100달러를 환전하면, 이런 대량의 동화가 되어버려, 어찌할 바 모르는 미국인이 도모해서의가 있었네요.
이 다음, 마부를 고용하면, 마부에게 가지고 달아남되었습니다 ww
512명전:조선狗 [] 투고일:2012/03/07(수)19:58:02.62 ID:sWkn+fbh [17/24]농본주의,,, 농담을.
조선은 완벽한 노예사회이었습니다. 잘못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므로 농업은 완전히 발전하지 않았다. 알 것입니다? 조선에는 미(쌀)에 관계되는 문화는 전무, 잡곡만 ,,들판에서 없애기 때문에.
수전이 없었던 것은 ,, 여러가지 여행기에 나와 있다.
513명전:아기미 통신 [] 투고일:2012/03/07(수) 19:58:16.04 ID:CfnqS5V8 [7/21]>> 5071개월분의 체류 취재비용.
1904년 당시는, 어느정도의 전문기능을 가지는 사무원의 주급이 3달러∼4달러
514명전: <⊙`∀´>(´·ω·`) (`【하】´)さ [] 투고일:2012/03/07(수) 19:58:22.74 ID:954qr4Q8 [1/12]>> 507150달러는 150엔입니다. (무역 은화)
1엔을 현대의 감각을 기준에 가치를 생각하니, 4000엔정도.
즉 메이지(明治)의 150엔은 현대의 60만엔정도인가라고 생각합니다.
515명전:조선狗 [] 투고일:2012/03/07(수)20:00:46.01 ID:sWkn+fbh [18/24]말의 이야기로 재미있는 것은 ,,조선에 말은 없었다.
있었던 것은 초소형의 노새의 류.
521명전: <⊙`∀´>(´·ω·`) (`【하】´)さ [] 투고일:2012/03/07(수) 20:08:53.55 ID:954qr4Q8 [3/12]まぁ, 무엇이다.
이조 아키라(鮮)의 화폐경제는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붕괴되고 있어 물물교환이 메인이었다.
이라든가.
처음부터 「상업」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행상만」이었다.
이라든가.
그 가치가 붕괴되고 있는 화폐를 농민이 조금 모아서 저축하면 양반이 강제 빌린 돈을 신청했다.
이라든가.
526명전:아기미 통신 [] 투고일:2012/03/07(수) 20:16:08.99 ID:CfnqS5V8 [8/21]>> 518그것입니다.
여기에서 내륙에는, 환전상은 없어요,라고 배우고, 그럼 환전해 두자,라고 하면, 은화·금화는 유통하지 않고 있으므로 전부 동화에 되버렸습니다 ww
562명전:아기미 통신 [] 투고일:2012/03/07(수) 20:40:34.70 ID:CfnqS5V8 [15/21]>> 552점포 준비를 취한다고, 약탈되거나, 가인을 휩쓸리거나 하는 것이다.
양반에.
그리고, 몸값 가지고 오지 않으면, 발을 접어지거나, 눈을 도려 내지거나.
이렇게 되지 않은 곳 말야, 개인에서 야쿠자처럼 보이는 고용인 안고 있었던 【도코】만.
그 의미라도, 대부분이 행상이어요.
http://d. hatena. ne. jp/perushaneko/20081009/1223507080hitkot|10-0701:00
(´H”)y-∼∼ 이 스파게티와 같은 물체는 무엇입니까? www
ppsh43|10-0701:17
Ψ(`∀´)Ψ옛날, 중량계산을 똑똑 떨어뜨렸지만, 확실히 2달러정도로 인력운반의 한계를 넘은 것 같은 (30kg)연유하러 이 숫자, 환전 레이트나 중량등은 최저로의 계산이기 때문에, 실제는 더욱 증가합니다 w.
→
100kg|10-0701:20
일본의 에도(江戶) 시대의 한냥 말야, 지금으로 하면 50만엔 짜리 지폐 말야 느낌일까. 미환산의 물가로 말하면 10만엔정도이지만, 국민한사람당의 GDP규모로 생각하면, 지금보다 쭉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요. 그래도, 유통의 기축으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화폐이었지만. 자, 조선은 정말로 원시시대이구나. w→
tiburon|10-0701:20
일본은 미(쌀)로 조세 잡고 있었지만, 조선은 왜 잡고 있었던 것일까?
→
→ ppsh43|10-0701:22
Ψ(`∀´)Ψ일본이라면 놓쳐지는, 조와 피【니카】? 히데요시(秀吉)의 조선 정벌의 때에, 【조센】의 곳간의 내용을 조사하면, 85%이 미(쌀)이외의 잡곡이었을 모양이지만 ···. 현미에 이르러는, 1, 5% ···.
tiburon|10-0701:30
뒤에 있는 사람도 구경하고 있다. 양복을 입고 있는 부자인 듯한 사람이다. 이것만 보아도 환전한다고 하는 것이 일상이 아니었던 것을 안다.
prozokukoku|10-0701:42
이자베라 버드의 증언이라고 1달러 3200장, 3200×150=480000… 48만장orz→
cl6328beta|10-0701:49
해산물의 거래인가라고 생각합니다 た ...... .
blue_blue_blue|10-0701:08
이자베라·버드의 「조선 기행」 안(속)에도 비슷 비슷한 기술이 있구나. 환전하면 어이없는 양의 전의 다발(속)이 되었다고 …→
100kg|10-0701:09
남쪽의 섬이 거대한 돌貨와 같은 감각이네요. w
Ψ(`∀´)Ψ연유하러, 후일담이 있어서, 사스가(流石)에게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조센】인을 고용하고, 맡아 두게 하고 있으면,””” 모두 가지고 달아남””되었을 모양인 w. (´_⊙`)b→
→ koba2005|10-0701:05
후일담은 몰랐지만, 【풋】에서 토라져 →
→ erokap|10-0701:06
벽|`) 이것을 들어 나른 놈도 굉장하구나
http://1st.geocities.jp/mrf454_pp/HTML/Kor2s1883.html
Korea silver 2chon ND(1883)
朝鮮 大東二銭銀貨 1883年 (100年以上前のカラーコイン)
重さ 7.2g、直径 27.35mm、厚さ 1.5mm、状態は、VF+。
長らく円形方孔の鋳造貨幣を造り使い続けていたアジアですが、19世紀にヨーロッパの影響を受けてから、機械打刻の円形貨幣が造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このコインは円形で、周囲にギザまでもっていますが鋳造です。機械打刻風鋳造貨幣といえばよいのでしょうか。周囲のギザは機械打刻貨幣を意識しています。さらに面白いのは、コインへ色を付けていることです。カラーコインが人気の現在ですが、すでに100年前にあったのですね。
http://item.rakuten.co.jp/icoins/11030903/
朝鮮では、1678年から200年に亘って断続的に鋳造された常平通寶や、発行1年で鋳造を停止した銀銭(大東1,2,3銭の3種)以外にも盛んに粗悪品が鋳造され物価は高騰、国民の経済生活は脅かされることとなりました。そこで政府もようやく近代的貨幣制度を樹立する必要を認め、日本より顧問を招き新式機械を導入して新貨幣の鋳造にあたり、高宗25年(明治21年)に初めて 1圜銀貨、10文と5文銅貨の3種類を鋳造しましたが、まもなく日清戦争が勃発して広く流布する前に発行を止めています。日清戦争中の明治27年、日本の指導のもとに新式貨幣発行章程が公布され、初めて近代的貨幣制度の樹立を見るにいたりました。1分、5分、2銭5分、1両、5両の5種類が銀本位制の下に発行されました。(実際には公布の2年前から発行)この時発行された俗に5テールと言われる5両銀貨が本貨です。この貨幣制度は実績が伴わず、本位貨幣の5両は僅かに19,923枚を発行しただけで、鋳造利益の多い白銅貨のみ濫発され、被害が大きかった。(図録 日本の貨幣より抜粋)
朝鮮 5両銀貨 開国501年(明治25年) 特美 未洗い
直径:38.1mm 量目:26.96g 銀品位:900/1000 発行数:19,923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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