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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rch 26, 2012

Joseon envoy; Park seo saeng 朴端生 통신사 in 1429

朴端生 통신사 戊申通信使 박서생(朴端生)
世宗が通信使朴端生に「倭の紙、堅籾、造作の法また宜しく伝習すべし」

1429年、日本に来た朴端生は、
「日本の農人、水車の設けあり」として、
学生の金慎に「造車の法」を精査させて模型を作り、
鍍銀(銀メッキ)、造紙(紙漉)、朱紅、軽粉、
などの製造法を祖国に報告している。

日本の貨幣経済の実態や、店舗商業の発展等にも及んだが、その中で技術にまで言及していたのは、渡航前に世宗から、
「倭の紙、堅籾、造作の法また宜しく伝習すべし」と、日本の技術を導入するように命じられていたからである。

水車はその百年以上も前に、「徒然草」(第五十一段)に記されており、当時には農民達の手で取り付けられていた事を考えると、日本と朝鮮の間には相当の技術格差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

세종 41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7월 1일(신해) 3번째기사
일본에서 《백편상서》를 사오게 하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말하기를,
“일본국(日本國)에 《백편상서(百篇尙書)》가 있다고 들었는데, 통신사(通信使)로 하여금 사오도록 하고, 또 왜국의 종이는 단단하고 질기다 하니, 만드는 법도 배워 오도록 하라.”
하니,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가 계하기를,
“일본국에는 금이 많이 생산되니, 명주와 모시[苧布]를 가지고 가서 사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에 바치는 금·은을 만일 면제 받을 수 없다면 사다가 바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책 136면
【분류】 *외교-왜(倭) / *광업(鑛業) / *공업(工業) / *무역(貿易)

世宗 41卷, 10年(1428 戊申 / 명 선덕(善德) 3年) 7月 1日(辛亥) 3번째기사
일본에서 《백편상서》를 사오게 하다

○上謂代言等曰: “聞日本國有百篇《尙書》, 可令通信使購來。 且倭紙堅韌, 造作之法, 亦宜傳習。” 知申事鄭欽之啓: “日本國多産金, 以紬苧布買來何如?” 上曰: “進獻金銀, 如不得蠲免, 買來進貢可也。”

【태백산사고본】 13책 41권 1장 A면
【영인본】 3책 136면
【분류】 *외교-왜(倭) / *광업(鑛業) / *공업(工業) / *무역(貿易)



世宗「日本国に百篇の『尚書』があると聞くから、通信に購入させてくるよう命じるべきだ。
また、和紙は丈夫でしなやかだから、その作り方もまたよろしく伝習せよ」
秘書官「日本国は金が多産ですから、紬や苧麻の布と引き換えに買ってきたは如何か」
世宗「(中国に)進貢する金銀が免れないのならば、金を買ってきて献上すべきだろう」


the document is purveyed by halt san

야마토의 종이, 견인, 조작의 법 또 잘 전습할 것」이래. 

Park Seo saeng,a member of Mooshin Tongshinsa envoy to japan.
King Sejong ordered to diplomati Park Seo saeng that well learn the way or techical to make japanese paper,blade,architecture.

Park Seo saeng came to Japan in 1429,
as "japanese farmers are making waterwheel",
he let researched how to make mile by student Kim, and created the model,
he informed how to make Silver impregnation (silver plated), papermaking (paper combing),vermilion red, light powder,reported the methods for manufacturing such as to his homeland.

The current status of Japanese economy, such as the development of stores and commercial, even referred to the technology in it,

This is because, prior to starting the mission, he was instructed by Sejong (a Korean king) that 'You should learn how to make paper, how to make hard blades and how to build houses and should bring back the technologies concerned,' or he was instructed to introduce technologies in Japan.
- Wikipedia日英京都関連文書対訳コーパス

a waterwheel had been written in "Essays in Idleness, Tsure zure gusa,article 51" more than a hundred years before, at that time to think that be installed at the hands of farmers, it is deemed there was so much technology gap between Japan and Korea.


1428
In the 10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the Joseon court dispatched Pak Sǒ-saeng as chief envoy of a mission to the shogunal court of Ashikaga Yoshinori in Japan.[10]
조선 통신사 1428년(세종 10년) 박서생 이예 김극유
http://www.earticle.net/article.aspx?sn=110412
戊申通信使

Joseon missions to Japan
1 Joseon diplomacy
2 Joseon missions to the Muromachi shogunate
2.1 1392
2.2 1398
2.3 1404
2.4 1406
2.5 1409–1410
2.6 1413
2.7 1420
2.8 1423
2.9 1424
2.10 1428
2.11 1432
2.12 1439
2.13 1443
3 Joseon missions to Hideyoshi
3.1 1590
3.2 1596
4 Joseon missions to the Tokugawa shogunate
4.1 1607
4.2 1617
4.3 1624
4.4 1636
4.5 1643
4.6 1655
4.7 1682
4.8 1711
4.9 1719
4.10 1748
4.11 1764
4.12 1811
5 Joseon-Japan diplomacy adapting
5.1 1876



This study is about Mooshin Tongshinsa(1428)、the first communications man of Joseon and Park Seo-Seng。The summary of the result is as follow。First、Mooshin Tongshinsa's dispatch background and journey。Mooshin Tongshinsa had performed a religious service to Shogun Ashikaga Yoshimochi(足利义持)the 5th generation of Muromachibakuhu(室町幕府)and was dispatched to celebrate the succession to Shogun title of Ashikaga Yoshinori(足利义敎)the 6th generation of Shogun。The journey started in December 7th 1428 from Seoul and it ended in December 3rd 1429 with the report to the King after 100 members have made a round trip of Second、it's the appearance of Park Seo-Seng reflected as a fine writer in Sahaeng literature。The fact that Sejong ordered Song Hee-Kyung(宋希璟)to write the Sahaengrok、In Dongmoonseon there are three poems that were written during the Sahaeng so there's a big possibility that the Sahaengrok of Park Seo-Seng actually existed。Also Dongmoonseon in the poem written during the honored going of the envoy、the difficult journey and the responsibility as the envoy executing the order of the King、the exotic experience such as Japanese food and landscape are all well described and displaying his ability as a fine writer。Third、Park Seo-Seng's will of a reform reflected in the report letter to the King。In Park Seo-Seng's report、 "rational foreign policy proposal through a precise detection on the situation in Japan、induction of smooth circulation of money and industry activati​​on、improvement of agricultural policy efficiency through automatic water mill and useful plant cultivati​​on"、his strong will of reform as a diplomat、economic politician、agricultural policy reformer is well reflected。In this way、Park Seo-Seng was the first communications man of Joseon dynasty who left his mark in Sahaeng literature and national policy as the responsible of Mooshin Tongshinsa through the honored going of the envoy.


통신사는 조선시대에 전반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교린외교사절이자 문화사절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학계의 연구는 자료가 영성한 조선전기 통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조선후기 통신사에 집중된 것이 사실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연구경향에 대한 반성으로 조선 최초의 통신사인 戊申通信使(1428)와 사행의 총책임자인 朴瑞生을, 사행의 파견배경과 사행노정, 문장가ㆍ개혁가로서의 박서생 등으로 나누어 조명한 것이다. 무신통신사는 室町幕府 5대 장군 足利義持를 제사지내고, 6대 장군인 足利義敎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 노정은 1428년 12월 7일 서울을 출발하여 약 100여 명의 인원이 ‘부산-對馬島-壹岐島-朴加大(博多)-赤間關-黑石西關(上關)-多可沙只(鎌刈)-都毛梁(鞱浦)-小尾途津(下津)-胸比(日比)-牛澹(牛窓)-無路(室津)-一場(一谷)-兵庫-王部落(京都)’등을 왕복한 뒤 1429년 12월 3일에 왕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사신행차를 마쳤다. 박서생은 東文選에 使行詩 3수를 남기고 있다. 그의 使行詩는 왕명을 수행하는 사신으로서의 책임감과 사행의 험난함은 물론, 일본 음식이나 경치 등 이국적 체험을 잘 표현하여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밖에 세종이 송희경에게 사행록 저술을 명령한 사실을 통해 비록 현전하진 않지만, 박서생의 일본사행록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또 박서생은 사행을 끝난 뒤 사행에서 느낀 바를 왕에게 보고하는 「復命」에서 자신의 개혁의지를 드러낸다. 「복명」에는 일본 정세의 정확한 탐지를 통한 합리적인 외교정책안의 제시, 화폐의 원활한 유통과 산업의 활성화 유도, 자동 水車와 유용한 식물의 재배를 통한 농업정책의 효율성 제고 등 외교관ㆍ경제정책가ㆍ농정개혁가로서의 그의 개혁의지가 명확히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 최초의 통신사인 무신통신사의 총책임자 박서생은 사행문학 뿐 아니라 국가정책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http://cafe.daum.net/yeohwicenter/4NNT/65?docid=BfRN4NNT6520100126140209


뿌리아름역사동아리 - [한일관계사]6. 朝鮮通信使 (1)室町時代 | Daum 카페


朝鮮通信使 (1)室町時代 室町時代의 朝鮮通信使에게는日本에 대한 国情視察의 임무도 주어져 있었던바, 1428년(正長 元年)의 통신사 일행 중에 포함되었던 書記官 申叔舟가 저술한 <海東諸国紀>에는 왜구금압의 요청에 추가하여 15항목에 걸쳐서, 倭寇根拠地, 倭寇와 지방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유력 고쿠진(国人) 및 토호(土豪)와의 관계, 都市部의 発展状況과 通貨政策 등의 국내상황, 불교의 전개상황 등이 조사보고되고 있다. ----------------------------------------------------------------------------------------------- 回数



目的・名称等

第1回

1429年(正長元年, 세종 10년)

通信使(足利義持 弔意와 足利義教의 승계 慶賀)정사 朴瑞生 부사 이예

第2回

1439年(永享11年, 세종 21년)

通信使 정사 高得宗 부사 윤인보

第3回

1443年(嘉吉3年, 세종 25년)

通信使(足利義教 弔意와 足利義勝의 승계 慶賀)정사 卞孝文 부사 윤인보

---------------------------------------------------------------------------------무로마치시대의 통신사는 총 3회에 걸쳐 도일하였는데, 이외에도 正使는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파견의 계획이 취소된 1413년(정사의 사망)과 1475년의 경우(설명은 일치하지 않으나) 대략 슈고다이묘나 유력 고쿠진의 이름을 사칭하여 임의로 교섭을 행하는 偽使가 횡행하거나 日朝貿易 자체가 지지부진하여 통신사 파견의 필요성이 없어진 경우)와, 1459, 1479년의 경우에는 통신사 파견이 취소되었다. 이후 도요토미정권까지 약 150년간 통신사 파견은 중단되었다. 1429년 일본에 온 朴端生은 金慎으로 하여금 水車제조법(造車の法)을 상세히 조사시켜 모형을 만들고 鍍銀(銀淘金), 造紙(紙漉), 朱紅, 軽粉 등의 제조법,日本貨幣経済의 실태, 店舗商業의 발전 등을 조선에 보고한다. 이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도항전에 「倭の紙、堅籾、造作の法また宜しく伝習すべし」라고 세종이 언급하였고 水車의 경우에도 이미 100년 전에 <徒然草>에도 기록되어있는바와 같이 당시의 일본 농민들에게는 일반적인 기술수준이었음에 미루어 양국의 격차는 벌어져있었다고 생각된다. -下條正男『日韓・歴史克服への道』 **통신사의 명칭조선은 1403년(태종 3) 명(明)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足利政權(족리정권)]도 책봉을 받아 조선·중국·일본간에 사대교린의 외교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권자로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고 하였다. 계해약조의 체결 이전에는 "통신사" 대신 "통신관",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정식으로 "통신사"의 "파견 규정"에 따라 보낸 것은 세종 10년(1428년)에 이르러서 이다. 이때 "정사(正使) 박서생", "부사(副使) 이예", "서장관(書狀官) 김극유"를 임명하고 "규례"에 따라 사신단을 구성한다. 결국 1428년(세종 10) 11월에 편성, 다음해 일본에 파견되었던 정사 박서생(朴瑞生)사절단이최초의 통신사라 할 수 있다.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에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에 편성된 박분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이 사행은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 되었다) 조선은 통신사를 마치 중국의 책봉사처럼 생각했는데 일본의 새 관백(關白 =쇼군)이 서면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와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가 와서 파견을 요청했기 때문에 조선의 새 임금이 서면 중국에 청승습사(請承襲使)를 보내 책봉을 요청하는 것과 흡사했고, 여기에 "화이관념"까지 작용한 결과다. 일본은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는 조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절차였지만, 국내적으로 조공사로 둔갑시켜 우월의식을 표출한다.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의 배경과 활동내용
임진왜란 전의 경우,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동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콩·목면 특히 면포를 가져갔다. 이어 일본 선종이 크게 부흥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들을 구하여 갔다. 이에 반하여 조선의 사절은 대개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대부분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왜구의 금지 요청과 축소관계 수립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어 일본의 금구책(禁寇策)에 대한 치하 및 범구자 처벌, 왜사의 귀환호송, 항왜의 배신에 대한 책유, 일본국왕사신의 보빙, 표류인의 호송에 대한 치사, 국왕·대장군·대마도주 등의 조위 경하 및 예물증여, 상역·어업표류민·피로인·세견선 등의 협의, 국내외정세의 탐사 등이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경우는 우선 임진왜란 직후 일본과의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 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일 양국 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인 통신사의 특징은 ①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장군에게 파견되어야 한다 ②일본장군에 대한 길흉조사,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해결이 목적이며, 회례·보빙의 의미는 없다 ③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장군 앞으로 서계(書契) 및 예단을 가지고 간다 ④사절단은 중앙관리 3명 이하로 한다 ⑤통신사, 그에 준하는 국왕사의 호칭을 써야 한다 등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사절은 대부분 정치적·외교적 목적으로 왜구 금지 및 수호관계 수립 등을 요청하였고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경제적인 면, 즉 동(銅)을 가지고 와서 쌀·콩·목면·면포 등을 가져갔다. **對馬島文書
한일교섭사 연구의 일급사료는 에도막부로부터 대조선창구의 역할을 위임받아 국교와 통상실무를 전담하던 對馬藩의 방대한 기록군인 對馬島文書이다. 이 자료에 포괄되어 있는 국서, 교환공문, 관계인사들의 개인 서장, 왜관과 같은 기관의 공적 기록, 무역실무의 거래문서 등등의 방대한 문서는 모두 당시의 일본어 문장체인 일본 근세일본어의 소오로오문체(候文文體)의 日文과 漢文草書로 된 고기록이다. 이 방대한 문서들은 현재 국사편찬위와 일본의 여러 기관에 분산 수장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전량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 복사되어 시판되고 있으나 이 사료를 읽고 내용을 소화할 수 있는 어문능력을 갖춘 연구자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현대일어를 알고 있고 상당한 한문소양을 지닌 漢學者라도 읽어낼 수가 없는 일본 근세사료인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외무성자료, 육해군관계의 軍文書와 일제시대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방위청문서, 일제의 내각기록과 공공기관의 행정문서 등을 독파하고 분석하여 평가연구되어야 하며 이런 사료섭렵을 위한 어학실력과 사료 탐색 활용능력에 따라 비로소 진정한 한일교섭사의 실체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섭사연구의 새 지평선> 이원순 **正使와 副使조선초기 정사는 대개 일본사행에 초행인 인물이 임명되었음에 비해 부사는 일본에 왕래한 경험이 많은 인물이 임명되어 교섭실무를 전담하고 정사를 보좌하였다. 부사의 경우 李藝와 尹仁甫(通事 출신으로 일본에 6회 사행하였고 大護軍까지 올랐다)를 들 수 있는데 李藝의 경우, 태종 8년, 세종 4년, 세종 6년, 세종 10년 등 4회에 걸쳐 각각 부사로 수행하였고, 윤인보의 경우 세종 21년, 세종 25년 등 2회에 걸쳐 부사로 수행하였다. 정사는 조선초기의 경우 종3품에 해당하는 직위의 관리가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박안신, 박서생, 변호문 등의 경우 거의 모두 대일사행이 처음이자 유일한 것이었다. 태종 8년 정사 朴和 부사 이예
세종 4년 정사 朴熙中 부사 이예
세종 6년 정사 朴安臣 부사 이예**박서생(朴瑞生)
생몰년 미상.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여상(汝祥), 호는 율정(栗亭)으로 중랑장 박점(朴漸)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성균관 학정이 되고, 태종 1년(1401) 증광문과에, 140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병조 좌랑이 되었으나 반차(班次)를 무시한 것이라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후 사헌부 집의 · 대사성이 되었고 1428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 해 정월 종묘 제향의 대축판사(大祝判事)로 친향(親享) 때 축문을 8자나 빼고 읽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에 우군첨총제 · 집현전 부제학 · 공조 · 병조의 참의 · 판안동대도호부사를 지냈다. 1433년 앞서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당시 배워온 수차(水車) 사용을 건의하여 농사의 관개(灌漑)에 혁신을 기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비안의 구천서원에 제향되었다. 편서로는 《야은언행록(冶隱言行錄)》이 있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율정 선생은 1429년(세종11)에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시행할 만한 내용을 담아 상소를 올린다. 여기서 율정선생은 “일본 농민에게 수차를 설비하여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 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 할 만한 곳에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灌漑)의 편리에 돕도록 하소서” 라고 하여 수차의 사용을 건의 한다. 豊臣秀吉에의 通信使 1590년의 통신사는 명목상으로는 도요토미의 일본통일을 축하하는 사절이었으나 침략의도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대마도의 소오씨가 중개를 담당) 1596년의 통신사는 明의 휴전교섭차 도일한 明使(冊封使)에 동행한 사절豊臣秀吉朝鮮通信使履歴



回数



目的・名称等

第1回

1590年(天正18年, 선조 23)

通信使 正使 黄允吉 副使 金誠一

第2回

1596年(慶長元年, 선조 29)

通信使 正使 黄慎 副使 朴弘長


** 본문은 일문위키의 번역으로 일본의 입장에서 통신사를 설명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인식과 다소 다른 점이나 용어가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2091101/10320459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

조선은 건국 후 1403년(태종3) 명(明)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足利政權〕또한 책봉을 받아 조선·중국·일본간에 사대교린의 외교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권자로서 현안문제해결을 위한 사절을 파견하였다.

▲한양에서 애도(동경)까지 이르는 조선 통신사의 여정의 그림


이때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고 하였다.

1428년(세종 10) 11월에 편성, 다음해 일본에 파견되었던 정사 박서생(朴瑞生)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라 할 수 있다.

▲옛날 일본인들이 그려놓은 조선 통신사 행렬도-이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는
당시의 수도격인 애도성이라고 함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은 회례사(回禮使)·통신사·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는데, 이 가운데 통신사의 특징은 ①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장군에게 파견되어야 한다 ② 일본 장군 대한 길흉조사,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해결의 목적을 갖지만 회례·보빙의 의미는 없어야 한다 ③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장군 앞으로 서계(書契) 및 예단을 가지고 간다 ④ 사절단은 중앙관리 3명 이하로 한다 ⑤ 통신사, 그에 준하는 국왕사의 호칭을 써야 한다 등이다.

▲조선 통신사의 전별연 모습

임진왜란 전 조선의 사절은 대부분 정치적·외교적 목적으로 왜구 금지 및 수호관계 수립 등을 요청하였고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경제적인 면, 즉 동(銅)을 가지고 와서 쌀·콩·목면·면포 등을 가져갔다.

1510년(중종 5)삼포왜란(三浦倭亂)을 계기로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에 수호할 것과 통신사의 파견을 끈질기게 요청하자 90년(선조 23) 조선은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보냈다.




임진왜란 후 1607년(선조40)에는 일본측의 화의를 받아들여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하는 400여 명의 사절을 보냈는데 이때 사신의 명칭을 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라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기유조약(己酉條約)을 맺고 국교가 다시 이루어지자 36년(인조 14) 사절단부터 통신사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으며 주로 장군습직을 축하하기 위하여 갔다.

※기유조약이란?
조선광해군 1년(1609)에 일본과 맺은 조약, 쓰시마섬의 세견선(歲遣船)을 20척으로 규정하였고, 사신의 접대, 벌칙 따위를 정하였다


1811년(순조 11)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될 때까지 9회에 걸쳐 파견되었으며 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수신사(修信使)로 개칭되었다.


통신사 일행의 구성은 정사·부사와 그 밖의 수행원으로 이루어지며 많을 때는 400∼500명에 이르렀다.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학술·사상·기술·예술 등을 전하기도 하였다.

▲일본 허구인 선사가 조선 통신사 일행중 마상 곡예사를 묘사한 그림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들은 《조선통신사행렬도》와 함께 당시 대일문물관계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조선 통신사 정사 조엄이 세이켄사의 수려한 풍광을 찬미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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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
1510년(중종 5) 4월 3포에서 일어난 일본 거류민의 폭동사건.
경오(庚午)의 난이라고도 한다.

삼포란-------
1.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
2.경남 진해시에 해당하는 웅천(熊川)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3.경상남도 방어진(方魚津)과 장생포(長生浦)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 염포(鹽
浦) 등을 말한다.


조선은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삼포(三浦:釜山浦·乃而浦·鹽浦)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했으며, 일시적인 체류가 아닌 개항장에 거주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의 수를 총60호로 한정시켰다.

▲1887년쯤의 부산 왜관 서관 지역의 전경사진.


그러나 그 수는 점차 늘어나 1474년(성종 5)에는 이미 400여 호에 2,000명을 넘게 되었다.

처음 약정된 60호 외에는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쇄환정책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조선정부가 확실한 단언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그 수는 계속 늘어나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들 항거왜인들은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거나 거주지역 내의 토지를 경작하여 생활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점차 왜리(倭里)라는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이탈하여 불법적으로 거주지역과 경작토지를 확대시켰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는 1429년(세종 11)부터 그들의 토지경작에 대한 수세론(收稅論)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대마도정벌 이후 상선이나 왜인들이 오지 않다가 최근에 비로소 교역하고 있으니 꼭 세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 수세책은 채택되지 않았다.

1494년(성종 25)에 이르러 거류왜인의 경전(耕田)에 대해서 수세하기로 했으나 회유책의 일환으로 또다시 면세의 혜택을 베풀었다.

삼포에 거류하는 왜인들은 조선정부로부터는 특혜를 받아 면세되었지만,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세종 때부터 거류인의 인구수에 따라 많은 면포를 받아갔다(大戶 2필, 小戶 1필).

그리고 공물을 수취하면서 삼포의 거류왜인을 총괄하는 조직체도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조직체는 기동성을 갖고 있어 뒤에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이처럼 조선정부는 입국 왜인에 대한 법규가 각 분야에 걸쳐 제정되어 있었으나 왜구 재발에 대한 의구심, 대의명분이라는 정치도의와 상국(上國)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교린정책의 기본정신이 합쳐져 왜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일관했다.

이에 왜인들의 법규위반사태가 빈번히 일어났음에도 오히려 관용·묵인함이 상례화되었다.

1506년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하여 법규에 따라 엄한 통제를 가하자 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1510년(중종 5) 4월 삼포의 왜인들은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마도주와 연합해 4,000~5,000명에 달하는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포와 제포에서 약탈·학살 등의 만행을 자행하고, 웅천성·동래성까지도 침공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징벌했다.

조선 군대는 3방면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그결과 삼포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고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왜적측은 선박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그리고 참수된 왜인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뒷날 입국하는 왜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다.

이 왜란으로 인하여 삼포의 왜관은 폐쇄되었으나,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여 국교가 회복되는 동시에 제포만 다시 개항했다.


※ 임신조약이란?

1512년(중종 7) 조선이 쓰시마 섬[對馬島] 도주(島主)와 맺은 교역조약.

임신약조(壬申約條)라고도 한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있은 후 조선은 삼포를 폐쇄하여 일본과의 교역을 단절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식량 등 필요물자를 조선에 의존해온 쓰시마 섬에서는 당장 물자의 곤란을 느껴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를 통해 조선에 교역의 재개를 청원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조선정부 내에서도 찬반양론이 있었으나 결국 교역의 재개를 허용했다. 그 이유는 쓰시마 섬이 전통적으로 왜구의 근거지여서 생활필수품의 궁핍은 결과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초래할 것이며, 대일본강경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안의 방어를 강화해야 하는데 이는 국방비의 부담이 과중하게 되고 왜관(倭館)무역을 통해 수입하는 물자 중 후추·의약품 등은 자국에도 필요하다는 것 등이었다. 대신 정부는 강화조건으로 삼포왜란의 주모자를 참수해 헌납할 것과 포로송환 등을 제시했다. 이에 1443년(세종 25)에 체결했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폐기하고 새로 임신조약을 맺게 되었다. 주요내용은 ① 왜인의 삼포 거주를 금하며 삼포 중 제포(薺浦:웅천)만 개항한다. ② 매년 쓰시마 섬에서 파견하는 세견선(歲遣船)은 이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한다. ③ 매년 조선에서 쓰시마 섬에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도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한다. ④ 특송선(特送船)은 폐지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쓰시마 섬 도주 이외 사람들의 세사미와 세견선은 허용하지 않았다. 또 도주의 선박 외에 정규항로를 벗어난 배는 무조건 적선(敵船)으로 간주하며, 일본사신의 수행원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금하는 등 왜인에 대한 관리조항을 보다 엄격하게 했다. 1541년 조선 군대와 왜인과의 싸움이 벌어지자 이 일을 계기로 제포는 형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하여 왜관을 부산포(釜山浦:富山浦)로 옮겼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인의 침범이 잦아지자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여 약 30년간 정식 교역이 두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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