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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rch 26, 2012

Ulsan in Gangnam,the past Daldong village landscape

http://blog.daum.net/bt7155/657

蔚山(ウルサン)の江南(カンナム)’達洞(タルドン)の過去の風景…農村の村情感



▲ 울산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제2회 특별기획전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전을 마련한다. 사진은 1930년대 울산 달리 사람들의 모습.
울산박물관(관장 김우림)이 야심차게 준비 중인 제2회 특별기획전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에 많은 시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1930년대 울산의 사회·경제상은 물론 당시 달리마을 사람들의 삶의 편린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울산의 과거를 보여주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는 특별전을 미리 둘러본다.
오늘날 달동은 ‘울산의 강남’으로 불릴 만큼 번화한 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127호 농가(農家)만 있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마을의 이름은 달리(達里)다.


▲ 1936년 7∼8월 일본 도쿄 제국대 학생들이 달리에서 농촌위생조사를 하고 있는 모습.
1936년 여름, 달리에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최응석을 비롯한 도쿄(東京)제국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마을에 와서 농촌위생조사를 벌인 것. 학생들은 마을에서 숙식을 하며 집집마다 방문해 영양과 위생상태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했다.

이들과는 별개로 일본 민속조사팀도 마을을 찾았다. 조사팀은 의식주(衣食住) 및 생업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이들은 주민들과 어울려 흥겨운 시간을 보냈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 촬영까지 했다.

이들 조사가 달리에서 이뤄진 것은 울산 출신의 농업경제학자인 강정택의 역할이 컸다. 그는 두 조사팀이 자신의 고향에서 조사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 강정택 자신은 사회경제조사를 벌였다.


▲ 1936년 울산 달리지역에 거주한 한 가족의 모습.
달리 위생조사 결과물은 『조선의 농촌 위생-경상남도 울산읍 달리의 사회위생학적 조사』(1940)로 간행됐다. 민속조사팀이 수집해간 자료 124점은 후에 일본 오사카에 있는 국립민족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당시 조사와 관련된 사진·동영상 등 각종 자료는 일본 미야모토(宮本) 기념재단, 가나가와(神奈川) 대학의 상민(常民) 문화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한 지역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조사보고서와 실물자료, 영상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아주 드문 사례다.

이런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0년대였다. 울산 출신의 인류학자인 이문웅(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교수가 밝혀냈다. 그 후 국립민속박물관이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울산 자료를 정리해 『향수-1936년 울산 달리』(2008)란 도록을 펴냈고 농촌위생조사 보고서도 번역 출판했다.

이렇게 모아진 자료들이 이번 울산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시민들을 만난다. 1936년 울산의 달리가 75년 만에 귀향(歸鄕)하는 셈이다.



동네주민 ‘타작마당’에 모여 도리깨질
■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1>1936년 달리마을
洞舍서 마을회의·공동작업도
공동우물 3개 식수사정 나빠


▲ 영화필름으로 만든 띠를 두른 밀짚모자를 쓰고 있고,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포플러 가로수가 길가에 이어지고 흰옷 입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콩잎 흔들거리고 있는 완만한 구릉 너머로 버섯 모양을 한 초가지붕이 눈에 보이는 곳”.

울산박물관이 발간한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기획전 전시도록은 75년 전 울산 달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지난 28일 개막한 ‘달리 특별전’은 울산의 과거를 보여주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 울산의 사회경제상은 물론 당시 달리마을 사람들의 삶의 편린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지는 독자들이 옛 달리마을의 정취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이번 울산박물관 특별기획전 전시 자료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타작마당에서의 달리 농민들 모습.
현재 달동 경로당 남서쪽에는 타작마당이 있었다. 이곳에서 동네주민들은 보리 등의 곡식을 말린 뒤 도리깨를 이용해 타작을 했다.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은 마을 중앙의 높은 언덕의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1967년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제당은 서당산(현재 달동주공아파트 일원) 당산나무 아래로 옮겼는데, 1980년대 중반 사라졌다.

1936년 여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울산 달리로 농촌위생조사를 나왔다. 학생들은 마을에서 숙식을 하며 집집마다 방문해 영양과 위생상태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했다.


▲ 달리 우물가.
농촌위생조사를 마친 조사단원은 달리 마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위생적인 우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두 개의 우물을 파서 마을사람들에게 제공했다. 그 옆에는 ‘의학위생조사단 기념’이라는 표시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위생조사 당시 달리에는 음료수용 우물 10개가 있었지만 7개는 개인소유였다. 대부분의 농가는 3개의 공동우물을 활용했는데 식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의 달동경로당에는 동사(洞舍)가 있었다. 동사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곳이자 공동 작업터였다. 동사 앞 대추나무에는 종을 매달아 두었는데 마을에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 사용했다. 그래서 이 종은 ‘불종’이라 불렸다.
(자료제공:울산박물관 / 사진출처:미야모토기념재단)


도쿄〜울산〜대련 노선 비행장 있었다
■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2>비행장이 보이는 마을 ‘달리’
20만㎡ 면적에 활주로 길이 600m
1938년 폐쇄 불시착륙장으로 이용

▲ 1930년대 울산비행장 사진엽서.
달리 마을 동쪽에는 비행장이 있었다.

울산에 비행장은 1928년 12월 2일 개장했다.
위치는 삼산평야 일대로 현재 현대백화점 부근에서 달동 문화공원과 남구청 앞 네거리까지 걸쳐있었다. 면적은 약 20만㎡에, 활주로 길이는 600m였다.

1929년 4월 항공우편, 9월부터 여객 수송을 했다. 운행노선은 도쿄-오사카-후쿠오카-울산-서울-평양-대련으로 이어졌다.

사용비행기는 6인승, 8인승 ‘포커 유니버셜’이었다. 요금은 기차와 기선의 1등석 요금과 같았다.
울산비행장은 1935년 제2기 공사를 벌여 약 13만㎡를 더 확장했다.

하지만 1936년부터 시작된 ‘조선항공 2기 확충계획’에 따른 대구비행장 설치공사가 시작되면서 폐쇄위기를 맞았다.

울산 사람들은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1938년 10월 울산비행장은 폐쇄됐고, 불시 착륙장으로만 이용됐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울산비행장은 1942년부터 일본군 비행장으로 사용됐다. (자료제공:울산박물관)





먹을거리 이웃과 나누던 훈훈한 정 켜켜이 배어
밥 보관하는 그릇 ‘밥포구리’
오늘날의 도시락 ‘초배기’

▲ 광주리를 이고 가는 달리 여인들. (사진 출처:미야모토기념재단)
울산박물관이 마련한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기획전에는 당시 달리마을 주민들이 쓰던 다양한 그릇을 만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1936년 여름 달리를 중심으로 신정리, 울산읍내, 병영 등지에서 수집한 것들이다. 75년이 흘렀지만 수집되던 시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도시락, 밥고리, 바구니, 소쿠리, 광주리, 채반, 술병, 대접, 주발, 숟가락, 식칼, 두레박, 조리, 쳇다리, 똬리 등의 다양한 그릇들이 눈에 들어온다.


▲ 두레박
그 시절 사람들은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이 생기면 이웃들과 나눠 먹었다. 그래서인지 수집된 그릇에는 당시 사람들의 훈훈한 정이 켜켜이 배어 있는듯하다

우선 <도시락>. 테에는 검은 칠을 했다. 울산에서는 이것을 ‘초배기’로 불렀다고 한다. 밥과 반찬을 담는 작은 그릇으로, 주로 점심밥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데 활용했다. 수집 장소는 울산읍 시장이다.

달리에서 수집한 <밥고리>는 대오리를 엮어서 만들었다. 바닥에는 통 대나무를 양짝에 대어 받침으로 썼고 위쪽에는 반원형의 손잡이를 달았다.


▲ 밥고리
밥을 담아 보관하는 그릇으로 사용했는데 달리에서는 ‘밥포구리’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곡물을 나르거나 갈무리 하는데 쓰였던 <바구니>와 껍질을 벗긴 싸릿개비를 걸어 만든 그릇인 <광주리>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전시됐다.

이 밖에 술병과 대접, 주발 등은 주로 사기로 제작됐다.
달리 그릇에는 재미있는 점이 있다. 현재 통용되는 그릇과 명칭이 조금 다르다(?)는 것.

젓가락은 ‘젯까치’, 식칼은 ‘정지칼’, 두레박은 ‘도르박’, 조리는 ‘조레이’, 쳇다리는 ‘체타리’, 바가지는 ‘바가치’(밥을 담아두는 것은 ‘촐촌래이’), 똬리는 ‘따베이’ 등으로 불렸다. (자료 제공:울산박물관)

‘삼베 저고리·바지’ 기본 노동복
■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4>옷 이야기
우천시 삿갓 도롱이·나막신
가죽소재 장신·당혜 즐겨신어

▲ 짚신과 나막신을 신고있는 달리 사람들. (사진출처: 미야모토기념재단)
울산박물관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기획전에는 1930년대 달리마을 사람들이 쓰던 옷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1936년 달리에서 복식생활 조사를 진행했던 미야모토 케타로가 쓴 글에 따르면, 1935년 전후의 조선 농촌에서는 노동복으로 남자는 모자를 쓰고 흰색 무명 윗도리 또는 삼베 저고리·적삼·조끼를 입었고, 아래에는 흰색 무명 또는 삼베 바지를 착용했다. 비 오는 날에는 삿갓 도롱이를 썼고, 나막신을 신었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 또는 삿갓을 썼고 상체에 흰 무명 또는 삼베 저고리·적삼을 착용했다. 아래에는 흰 무명 또는 베·인견의 속옷을 겹쳐 있었고, 검은 무명 또는 삼베 치마를 휘감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이번 ‘달리 특별전’에 선보이는 옷과 관련된 유물은 삿갓, 패랭이, 갈모, 장옷, 비녀, 등등거리, 등토시, 징신, 당혜, 짚신. 신골, 나막신, 다듬잇방망이, 빨랫방망이 등이다.

이 유물은 울산박물관이 ‘울산 달리 100년 학술교류사업(2009~2012년)’의 일환으로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으로부터 빌려온 것들로 2012년 2월 5일까지 시민에게 개방한다.


▲ ‘등등거리’. 등나무 줄기를 엮어 만든 것으로 여름에 땀이 배지 않고 바람이 통하도록 저고리 밑에 입었다.
전시 유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고깔과 비슷하게 생긴 <갈모>는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던 모자이다. 비에 젖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만들었으며, 쥘부채처럼 접을 수 있어 갖고 다니기에 편리했다.

<장옷>은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려쓰던 옷으로 울산 출신의 농업경제학자인 강정택이 수집했다. <비녀>는 여인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이다. 막대형으로 한쪽 끝은 뾰족하게 만들었다.

또한 <등등거리>는 등나무 줄기를 엮어 만들어 여름에 땀이 배지 않고 바람이 통하도록 저고리 밑에 입은 옷이다. <등토시> 역시 등나무 줄기를 엮어 만들었다. 울산읍 시장에서 수집했으며, 팔뚝에 끼도록 한쪽은 좁고 다른 한쪽은 넓게 제작됐다.

이와 함께 달리마을 사람들이 즐겨 신던 <짚신>과 <나막신> 뿐 아니라 가죽으로 만든 남자 신인 <장신>, 여자 신인 <당혜>을 선보이고 있다.

이 밖에 신의 모양을 잡거나 뒤틀린 모양을 바로 잡는데 썼던 <신골>, 햇빛을 가리기 위해 대오리로 만든 갓인 <패랭이>, 옷감을 다듬을 때 쓰는 <다듬잇방망이> 등도 만날 수 있다.
(자료제공=울산박물관)




동사에 서당 만들어 문맹퇴치운동
■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5>달리의 학교
낮에는 서당·밤엔 야학당으로
37년 울산공립농업학교 들어서

▲ 울산공립보통학교 사진엽서.
1936년 이전까지 달리에는 교육시설이 없었다. 이 시기에 달리 사람들은 읍내에 있던 울산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36년 무렵 동사(洞舍)에 서당이 만들어졌다. 이는 울산 출신 농업경제학자 강정택(1907~?)이 문맹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일종의 계몽운동이었다.
낮에는 서당, 밤에는 야학당으로 불리면서 교육을 했다. 얼마 후 달리에 중등교육기관이 옮겨왔는데, 바로 울산공립농업학교이다.


▲ 울산공립농업학교 1학년 최상도 학생이 사용한 교과서. (사진제공:한삼건 교수)
울산공립농업학교는 현재 울산공업고등학교의 전신으로, 1937년 3월27일 경상남도립의 5년제 갑종 농업학교로 인가됐다. 당시 농업학교 설립은 울산사람들의 염원이었다. 1937년 4월 학성동 농업보습학교에서 제1회 입학식이 열렸다.
울산군에서 펴낸 「소화십이년 군세요람」에 보면, 공립농업학교의 모집정원은 50명인데, 입학지원자가 529명이었고, 55명이 입학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농업학교의 인기가 어느 정도 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광복 후인 1947년에는 태화국민학교의 분교인 강남국민학교가 개교했다. 본래는 한국전력공사 부근에 있던 일본 군인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을 사용했는데 195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달리 학생들은 강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업학교에 진학했다. 이후에는 1951년 개교한 제일중학교나, 1954년 문을 연 울산중학교에 진학했다. 여학생은 진학률이 매우 낮긴 했지만, 1946년 설립한 울산여자 초급중학교에 진학했다. (자료제공=울산박물관)


쟁기·가랫날 등 그 시절 농업상 한눈에
■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6>농기구 이야기
논 물꼬 조절하는 연장 ‘살포날’
닭 알 품는 집 ‘닭둥우리’ 눈길

▲ 키와 체로 일하는 달리 여인. (사진제공=미야모토기념재단)

▲ ‘닭둥우리’. 닭이 알을 낳거나 품을 수 있도록 짚으로 만든 집.
앞서 연재를 통해 옷과 그릇, 달리의 학교 등을 소개한데 이어 이번에는 일과 관련된 다양한 농기구를 살펴본다.

울산박물관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기획전에는 그 시절 달리 사람들이 쓰던 농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대부분 1936년 여름 달리를 중심으로 신정리, 울산읍내, 병영 등지에서 수집된 것들이다.

우선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의 하나인 ‘쟁기’와 무엇을 박거나 칠 때 사용한 나무망치 ‘메’, 흙을 뜨고 파는 데 쓰는 연장인 ‘가랫날’이 있다.

‘가래’에 관련된 유명한 속담으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가 있다. 적은 힘으로 충분할 것을 쓸데없이 많은 힘을 들이거나,

▲ ‘주둥망’. 소가 풀이나 곡식을 뜯어 먹지 못하도록 주둥이에 씌우는 망태기. 달리에서는 ‘홍고리’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일이 작을 때 미리 처리하지 않다가 나중에 큰 힘을 들이게 될 때 이런 말을 사용한다.

땅을 파거나 흙을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 ‘괭이날’, 논의 물꼬를 조절하는 데 쓰는 연장인 ‘살포날’,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거름 등을 쳐내는 데 쓰는 농기구인 ‘쇠스랑날’, 검불이나 곡식 등을 긁어모으는 데 쓰는 농기구 ‘갈퀴’ 등도 선보이고 있다.

또 낫과 호미, 흙이나 거름 등을 담아 나르는 데 사용한 기구인 ‘삼태기’, 지게, 곡식의 알곡을 털어내는 데 사용하는 탈곡 연장인 ‘도리깨’ 알갱이를 훑어내는 도구 ‘훑이’, 곡식을 넓게 펴거나 한데 모을 데 쓰는 ‘고무래’, 곡식을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키’도 전시돼 있다.

특히 닭이 알을 낳거나 품을 수 있도록 만든 집인 ‘닭둥우리’와 소가 풀이나 곡식을 뜯어 먹지 못하도록 주둥이에 쒸우는 망태기 ‘주둥망’에 눈길이 모아진다. (자료제공=울산박물관)




여성 평균 초혼연령 17세
■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7>결혼과 임신·체격 상태
부인 53% 5회이상 임신
성인남 평균 신장 164.5㎝
발육기 아동 체격은 열세

▲ 달리의 어린이들. (사진제공=미야모토기념재단)
도쿄제국대 학생들이 1936년 울산 달리마을을 조사 한 뒤 펴낸 ‘농촌위생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달리 부인들의 평균 초혼연령은 17.02세였다. 생활 조건이 저하함에 따라 여성의 초혼연령도 낮아지고, 남자의 초혼연령은 급속하게 높아졌다.

전자는 생활이 궁핍하기 때문에 딸을 일찍 시집보내는 것을 반영하고 있고, 후자는 빈곤해서 가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반영한다.

달리 부인들의 평균 임신횟수는 5.15회였다. 0회 이상 4회까지의 부인 수는 47%, 5회 이상의 부인 수는 53%였다.
달리 부인들의 90%는 출산 당일까지 노동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출산 직전까지 했던 노동의 종류는 가사노동이 36.7%였고, 농사일에 62.9%가 종사하고 있었다.

임신 후 회복기간은 1주 이내인 사람이 90.4%나 되며, 1주~2주 이내인 사람은 4.1%에 불과했다. 회복기간을 거쳐 평소의 일에 종사하기까지의 일수는 산후 1주간 이내인 사람이 78.5%나 됐다. 농촌 여성들은 출산 전후 거의 휴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 전체 부인중에 42.7%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출산을 마친 것으로 조사됐다.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돌보아준 경우는 56%였다.



달리 성년남자 신장은 일본 국내의 성년남자보다 컸다. 그러나 발육기에 있는 아동들의 신장은 어떠한 연령대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일본 국내 아동보다 낮았다. 경제생활의 열악함으로 인해 영양이 불량했기 때문이다.

조사단은 체격조사 시에 성인 체격이 좋은 것에 반해, 아동이 열세의 체격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달리 청·장년 남자의 신장은 164.51㎝이다. 일본의 농부는 29~30세가 159.9㎝, 30~35세는 157.6㎝이다. 다른 문헌을 보더라도 일본 국내 농부의 신장은 달리 농부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달리 농부 체중은 56.81㎏으로, 일본 농부의 53㎏보다 3㎏ 더 무겁다. 1932년 일본 국내 장정 평균은 52.7㎏였다.

달리 농부의 앉은키와 흉위는 각각 89.01㎝, 87.76㎝였다. 일본 내무성이 조사한 자료에 흉위는 83.8㎝였다. 이를 보면 체격은 달리 농민이 일본 농민보다 좋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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