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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13, 2012

am i a caretaker for brother? by holy Motoyuki nomura

http://www.bethanyhome.net/cat10/post_172.html


私 は 兄 弟 の 世 話 人 で し ょ う か ?(2)

野村基之 (2010-05-18)

★ 2010年4月5日から8日にかけ韓国南西部全羅道光州グワンジュ Gwangjuを訪問しました。短い訪問でしたが感じました雑感想をここに書いてみることに致します。

5日の朝に小淵沢駅を出発し、羽田空港と金浦空港を経由し、全羅南道の中心都市光州市を訪問しました。
光州市立民族博物館がソウル歴史博物館と共同開催をした『異邦人が見たかつてのソウル』という特別写真展の開幕式に「異邦人 イバンイン」として出席するためでした。

1968年から1985年前後までのあいだ、訪韓ごとに密かに撮影しておいた韓国各地のフィルムやカラー・スライドなど最低数千駒をソウル歴史博物館に寄贈しました。
ソウル歴史博物館がそれらを纏め上げ、過去に2度にわたりソウル市内で大規模な写真展を開催したことがあります。今回初めてソウル市以外の地方都市での展示ということになりました。

光州市は、1980年5月に、朴正煕パッチョンヒ軍事独裁大統領の死後に成立したばかりの全斗煥チョン・ドファン軍事独裁大統領が率いる軍隊が、民主化を求める民衆を、強力な武力をもって弾圧した、いわゆる光州事件、或は5・18事件とも呼ばれている事件の中心地です。のちに大統領になった金大中を支持する人々が圧倒的に多い地盤です。

末期高齢者でもある独立福音伝道者にとりまして、韓国内で3回目になる写真展に自費参加するということは、決して易しい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今回も順子さんの並々ならぬ努力と妹の協力を得まして、何とか急遽最低限の旅費を調達して開幕式への出席が可能となりました。 老齢年金生活者にとっては相当に厳しい出費でしたが、再び多くを学ぶことができました。 いつものことなのですが順子さんには感謝のことばがありません。 50数回目の訪韓となったかと思います。


★ 韓国・朝鮮の多くの人々は、過去に日本が韓国・朝鮮に対して侵した国家犯罪に対して、日本人に対して、「恨ハン」という、深い被害者意識に基づく、私には説明するのがとても困難なのですが、被害者として、民族的な、粘着性の強い嘆き、恨み、痛恨の念のような複雑な感情を抱いています。日本人にはわからないことですが、日韓・日朝の関係を仲々に解消できない問題を抱えている民族です。未来よりも、どうしても過去に固執する傾向がある民族性の一つだと思います。

有史以前から、北東アジア諸方面から朝鮮半島に侵略していたいろいろな民族集団によって酷い目に会わされて来た朝鮮民族が、侵略者たちに対する憎しみや恨みの念を、「恨ハン」と呼んでい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最後に侵略して酷いことをした隣国日本に対して、この「恨ハン」が一気に噴出したのかも知れません。 

この点で、いまひとつ私に理解できないものがあります。おそらく私の勉強不足ということだろうと思いますが、有史以前から、千年も二千年も前から、朝鮮半島を侵略し、人々から略奪し、住民たちを殺戮して来た、多くの北東アジア民族に対して、私の知る限り、韓国人は日本に対するほどの不信感を抱いていないという事実です。

古くから特に歴代中国権力に対して朝鮮の権力者たちは貢物を捧げて来ました。中国人に対しての感覚は、日本に対する感覚とは全く異なったものがあります。
チャングム劇でも、中国からの薬草や食膳に関する場面が数多く出てきますが、日本となると倭寇のことだけです。 

朝鮮戦争のときにも、北朝鮮軍を支援するために中国共産党は義勇軍兵士を北朝鮮に派遣しています。そしてそのことで「外国軍人が祖国の土を汚した!...」と彼らが激しく怒ったということを見聞きしたことがありません。つい先日も金正日一行が中国を訪れ、援助を要請したようです。中国や蒙古や北東アジア諸民族に対して韓国人が、日本に対するように、怒ったり、恨んだりしているのを私は知りません。

そうなれば、民族的に、日本を見下げた国として無意識に理解し、その日本に侵略されたということで「恨ハン」の念を抱いているのかなあ...と、そのように考える折があります。民俗学や民族心理学を学んでいませんので、何とも申せません。

それから、これも私の主観的なひとりよがりの理解ですが、彼らの言う「恨ハン」は、どうやら南道から起こ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薄々の推測を私はしています。

それは、この「恨ハン」を謳った民族的音楽を聴いて、そのように感じているからです。パンソリとか伽?琴の音色に耳を傾けますと、そこに確かに彼らの言う「恨」を感じるからです。そして「南道民謡」というとき、それは全羅南道の民謡を指します。のちに詳しく述べるつもりですが、慶尚道人にいじめられ続けている全羅道の民衆の恨みが込められている民族音楽です。もともと両班が愛したものです。

早速の脱線になりますが...
パンソリとは、現在の北朝鮮では、古い朝鮮の両班ヤンバンの玩弄ものだとして拒絶されていますが、南半分の韓国では民族的、大衆娯楽として人々が愛しているものです。
主として風刺やエロティシズムや庶民の喜怒哀楽を豊かに表現する民族芸能の一つです。日本で言えば、浪花節、浄瑠璃などと同じような大衆芸能であろうかと思います。鼓と琴と横笛を伴奏させ、物語を語り、歌い、舞うということが多いです。
唱者(物語の語り手)が一人いて、伴奏鼓手がいます。これに笛や琴が参加するといつの間にか観衆全員が興奮状態に陥るようです。さしあたり阿波踊り的な要素もあるのかな...とも思います。「恨ハン」が琴の区切り区切りの音の違いで表されます。琴と鼓と笛だけの演奏は、日本人の多くには、単調すぎて最初は眠くなります。しかし唱者が加われば、俄然雰囲気が変わり、観客は興奮状態に陥ります。

韓国人・朝鮮人の世界観や宇宙観を学んだことがありませんし、彼らの北東アジア観を調べたわけでもありませんので、何とも言えません。最近の韓国は若い人たちの国になって来ましたので、この「恨ハン」という言葉が使われる回数は減ったかとも思います。しかし、劇場などでパンソリを鑑賞すると「恨」は確実に蘇って来ます。

そして、この「恨ハン」という漢字が韓国・朝鮮の人々の人生のどうしょうもできないような重荷に対する個人的な感情を表すものなのかどうか、私にはわかりません。人生の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ような悲しさとか、寂しさとか、諦め切れないような辛さをも含むものなのかどうか、わかりません。悩み多き人生と言う意味で、苦悩や涙や溜息を意味する表現でもあり得るのではないかとも思いますが...

いずれにせよ、年配の韓国人の胸の中には日本の植民地時代を覚えておられる人々が多くいらっしゃり、そういう方々の日本に対する「恨みハン」の念の存在を日本人訪韓者は心のどこかに留めて置くべきだろうかと思います。

まだまだ足りませんが、この点を私なりに踏まえての旅行でした。
クリスチャンを含めたほとんどの韓国人が日本人に対する拭い去ることができない、根深い猜疑心、被害者意識、反日感情、憎悪感を抱いているものと私は基本的に理解していますが、今回の短期間の旅行でも、そのような感情、「恨ハン」を感じました。
ついこのあいだまでの日本による侵略と植民地化の事実が、韓国人・朝鮮人に対し与えた深い傷跡は、彼らの民族性を考えるとき、これから今後何百年にもわたって、韓国人・朝鮮人の心に残るのではないかと、そのように感じ、心を痛めました。

日本人は、戦時中は、鬼畜米英と教えられ、そのように信じ込んでいました。英語廃止ということで、野球に使う名称まで使わないということでした。
しかし、占領米軍の日本への進駐と共に、私たち日本人は颯爽と着物を捨て、パンを食べるようになり、小泉純一郎がエルビス・プレスリーの真似をするのです。過去のことをケロリと忘れてしまう、順応性の豊かな国民性を持っています。
韓国・朝鮮の人々は、必ずしもそうではないようです。 そこを抜け出すのが困難な「恨ハン」という民族性が深く人々の心の奥底に横たわっています。拉致問題なども、この両者の民族性の違いを無視して解決を語ることは困難なように思います。

円高韓流ブームに乗って、気軽に訪韓し、大声を張り上げながら、外国に来ているということをすっかり忘れ去って、商店街を闊歩し、狂喜する多くの日本人買い物客の姿を見るごとに、無邪気にはしゃぎまわる横柄な日本人買い物客の姿勢が、韓国人の心をどれほどまでに逆撫でしているのかな...と考えてみますと、また、そのような韓国人の心の痛みにまったく気づいていない日本人と、現地の人々との落差をひとり思うとき、更なる痛みを覚えました。侵略するとは、実に愚かなことなのです。

나는 형제의 간사일까요? (2)

노무라(野村) 모토유키(基之)(2010-05-18)

★2010년4월5일부터 8일 닮기 시작해 한국 남서부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구완쥬】 Gwangju를 방문했습니다. 짧은 방문이었습니다만 느낀 잡감상을 여기에 써 보는 것에 하겠습니다.

5일의 아침에 고부치자와(小淵澤)역을 출발하고, 하네다 공항(羽田空港)과 김포 공항(金浦空港)을 경유하고, 전라남도(全羅南道)의 중심도시 광주시(光州市)를 방문했습니다.
광주시(光州市)립 민족박물관이 서울 역사박물관과 공동개최를 한 『이방인이 본 그전의 서울』이라고 말하는 특별사진전의 개막식에 「이방인 이반 인」라고 출석하기 위해서이었습니다.

1968년부터 1985년 전후까지의 사이, 방한마다 살며시 촬영해 둔 한국 각지의 필름이나 컬러·슬라이드등 최저 몇천말을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서울 역사박물관이 그것들을 전부 정리하고, 과거에 2도에 걸쳐 서울 시내에서 대규모인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처음으로 서울시이외의 지방도시에서의 전시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시(光州市)는, 1980년5월에, 박정희【팟촌히】군사독재 대통령의 사후에 막 성립한 전두환 전두환 군사독재 대통령이 인솔하는 군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을, 강력한 무력을 가져서 탄압한, 소위 광주(光州) 사건, 혹은 5·18사건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사건의 중심지입니다. 이후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반입니다.

말기고령자이기도 하는 독립 복음전도자에 있어서, 한국내에서 3회째가 되는 사진전에 자비참가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준코(順子)씨의 보통이 아닌 노력과 여동생의 협력을 얻어서, 어떻게든 갑작스럽게 최저한의 여비를 조달해서 개막식에의 출석이 가능해졌습니다. 노령 연금 생활자에 있어서는 상당히 엄격한 출비이었습니다만, 다시 많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평소의 것입니다만 준코(順子)씨에게는 감사의 말이 없습니다. 50몇회째의 방한이 되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일본이 한국·조선에 대하여 침범한 국가범죄에 대하여, 일본인에 대하여, 「원한【한】」이라고 하는, 깊은 피해자 의식에 기초를 두는, 나에게는 설명하는 것이 매우 곤란합니다만, 피해자로서, 민족적인, 점착성이 강한 비탄, 원망하고, 통한의 생각과 같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모르는 것입니다만, 일한·일조의 관계를 사이들에 해소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는 민족입니다. 미래보다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에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 민족성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사이전부터, 북동아시아 여기저기면에서 한반도(朝鮮半島)에 침략하고 있었던 여러가지 민족집단에 의해 지독한 눈을 만나게 해 온 조선 민족이, 침략자들에게 대한 미움이나 원한의 생각을, 「원한【한】」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최후에 침략해서 지독한 일을 한 이웃나라 일본에 대하여, 이 「원한【한】」이 단숨에 솟아나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 더 나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나의 공부 부족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만, 유사이전부터, 1000년이나 2000년이나전부터, 한반도(朝鮮半島)를 침략하고, 사람들에게서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륙해 온, 많은 북동 아시아 민족에 대하여, 내가 아는 한, 한국인은 일본에 대할 만큼의 불신감을 품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옛부터 특히 역대 중국 권력에 대하여 조선의 권력자들은 공물을 바쳐 왔습니다. 중국인에 대하여의 감각은, 일본에 대한 감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장금 극이라도, 중국에서의 약초나 밥상에 관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만, 일본이 되면 왜구만입니다.  

조선 전쟁의 때에도,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중국 공산당은 의용군 병사를 북한에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 「외국군인이 조국의 흙을 더럽혔다! ...」이라고 그들이 격렬하게 화냈다고 하는 것을 견문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일전도 김정일 가즈유키(一行)가 중국을 방문해, 원조를 요청한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몽고나 북동아시아 제민족에 대하여 한국인이, 일본에 대항하게,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민족적으로, 일본을 멸시한 나라로서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그 일본에 침략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원한【한】」의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가. .. 과, 그렇게 생각하는 때(시기)가 있습니다. 민속학이나 민족심리학을 배우고 있지 않으므로, (아뭏든)뭐라고 신せ 조숙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이것도 내가 주관적인 독선적인 이해입니다만, 그들이 말하는 「원한【한】」은, 아무래도 미나미도(南道)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라고 하는, 어렴풋이의 추측을 나는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원한【한】」을 강조한 민족적 음악을 듣고,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소리라든가 말벗(시중)? 거문고의 음색에 귀를 기울인다고, 거기에 확실히 그들이 말하는 「원한」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나미도(南道) 민요」라고 할 때, 그것은 전라남도(全羅南道)의 민요를 가리킵니다. 이후에 자세하게 말할 생각입니다만, 경상도(慶尙道)인에게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전라도(全羅道)의 민중의 원한이 담아져 있는 민족음악입니다. 원래 양반이 사랑한 것입니다.

곧의 탈선이 됩니다만 ...
판소리와는, 현재의 북한에서는, 낡은 조선의 양반 양 밴의 우롱 물건이다고 해서 거절되고 있습니다만, 남반의 한국에서는 민족적, 대중오락으로서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로 풍자나 에로티시즘이나 서민의 희로 애락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민족예능의 하나입니다. 일본에서 말하면, 나니와부시(浪花節), 정유리등과 같은 대중예능일까라고 생각합니다. 북과 거문고와 횡적을 반주시켜,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고, 춤 춘다고 하는 적이 많습니다.
唱사람(이야기의 이야기꾼)이 1명 있고, 반주 북 잡이가 있습니다. 이것에 피리나 거문고가 참가하면 어느사이에 관중 전원이 흥분 상태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당분간 아와(阿波) 춤적인 요소도 있는 것일까. ..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원한【한】」이 거문고의 단락 단락의 소리의 차이로 나타내집니다. 거문고와 북과 피리만의 연주는, 일본인의 많이에는, 지나치게 단조로워서 처음에는 졸려집니다. 그러나 唱사람이 가해지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고, 관객은 흥분 상태에 빠집니다.

한국인·조선인의 세계관이나 우주관을 배운 적이 없고, 그들의 북동아시아 관을 조사한 리도 없으므로, (아뭏든)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한국은 젊은 사람들의 나라가 되어 왔으므로, 이 「원한【한】」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는 회수는 줄어들었는가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극장등에서 판소리를 감상하면 「원한」은 확실하게 되살아나 옵니다.

그리고, 이 「원한【한】」이라고 하는 한자가 한국·조선의 사람들의 인생의 어떻게 짊어지나 할 수 없는 것 같은 무거운 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인 것인가 아닌가, 나에게는 모르겠습니다. 인생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 같은 슬픔이라든가, 외로움이라든가, 포기해 끊어지지 않는 것 같은 괴로움도 포함하는 것인 것인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고민해 많은 인생라고 말하는 의미로, 고뇌나 눈물이나 한숨을 의미하는 표현이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합니다만 ...

어쨌던, 연배의 한국인의 가슴 안에는 일본의 식민지시대를 기억하고 계시는 사람들이 많이 오시고, 그러한 여러분(여기저기)의 일본에 대한 「원한【한】」의 생각의 존재를 일본인방한자는 마음의 어딘가에 그쳐서 두어야 할까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만, 이 점을 내 나름대로 근거로 해서의 여행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을 포함시킨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대한 닦아낼 수 없는, 뿌리깊은 시의심, 피해자 의식, 반일감정, 증오감을 품고 있는 것과 나는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의 단기간의 여행이라도, 그러한 감정, 「원한【한】」을 느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의 일본에 의한 침략과 식민지화의 사실이, 한국인·조선인에 대하여 준 깊은 상처 자국은, 그들의 민족성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이후 몇백년에도 걸치고, 한국인·조선인의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닐까라고, 그렇게 느끼고,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일본인은, 전시중은, 귀축 미국 영국과 배우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영어폐지라고 하는 것은, 야구에 사용하는 명칭까지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했다.
그러나, 점령 미군의 일본에의 진주와 함께, 우리들 일본인은 당당하게 기모노를 버리고, 빵을 먹게 되고, 고이즈미(小泉) 준이치로(純一郎)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흉내를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게로리】라고 잊어버리는, 순응성이 풍부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조선의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기를 빠져 나가는 것이 곤란한 「원한【한】」이라고 하는 민족성이 깊이 사람들의 마음의 깊은 속에 가로막고 있습니다. 납치 문제등도, 이 양자의 민족성의 차이를 무시해서 해결을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한 것 같이 생각합니다.

엔고한류 붐을 타고, 가볍게 방한하고, 대소리치면서, 외국에 와 있다고 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 떠나고, 상점가를 활보하고, 미친듯이 기뻐하는 많은 일본인쇼핑 손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순진하게 신이나 떠들어 도는 거만한 일본인쇼핑 손님의 자세가, 한국인의 마음을 얼마정도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 이라고 생각해 본다고,또, 그러한 한국인의 마음의 아픔을 완전히 알아차리지 않고 있는 일본인과, 현지의 사람들과의 차를 혼자 생각할 때, 가일층 아픔을 느꼈습니다. 침략한다와는, 실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005824149&code=41121111


1 名前:天の書記φ ★[sage] 投稿日:2012/02/13(月) 16:22:25.70 ID:???
http://image.kukinews.com/online_image/2012/0213/20120213_seob3.jpg

1970年代に「清渓川(チョンゲチョン)貧民の聖者」として知られた日本人「野村基之」(ノムラモトユキ・81・山梨県ベタニアホーム・写真)
(※1)(※2)牧師が13日午前、ソウル中学洞(チュンハク=トン)の日本大使館を訪問して、「挺身隊ハルモニ」問題を謝罪しない日本政府に
抗議し、大使館前の平和碑(慰安婦少女像)に祈りを捧げ献花する。
「諸廷垢(チェ・ジョング)記念事業会」(※3)によると野村牧師は12日、慶尚南道(キョンサンナム=ド)統営市(トンヨン=シ)で開かれる
故チェ・ジョング国会議員の13回忌追慕式に出席。その後13日にソウルに上京し、より子夫人(79)らと平和碑の前で礼拝する予定だ。

野村牧師は訪韓に先立ち、国民日報宛の電子メールで「在韓日本大使館を訪問し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日本政府が誠実に応じるよう
要求することで、日本の公安当局から非国民・売国奴として耳目を集めることは知っている」とするが、「しかし、日本は神の定めに反した
従軍慰安婦などの歴史的事実について深く改心することこそが正しいことだ」と述べた。
彼は引き続き「現在日本では東京都知事の妄言など、ナチスのヒトラーを彷彿とさせる突然の右翼化の道を辿っている」とし「これを防ぐほど
の余命がない」「ハルベ(お爺さん=ハラボジの慶尚道なまり)だが、慰安婦少女像の前で「ウルミテ・ソン・ボンソヌァ」(※4)をフルートで演奏し、
慰安婦の痛みを癒してくださるよう神に訴える」と付け加えた。

野村牧師は70年初め、故チェ議員と華城(ファソン)活貧(ファルビン)教会キム・ジョンギル長老(当時、清渓川(チョンゲチョン)活貧(ファルビン)
教会執事)などと、清渓川(チョンゲチョン)と京畿道(キョンギ=ド)華城(ファソン)に貧民自活共同体の託児所を造るなど、80年代半ば迄救済
活動に勤しんだ。
特に彼は日本の朝鮮侵略を改心する牧師と共に祈祷会を開く以外にも、清渓川(チョンゲチョン)のスラム街撤去が実現されると、当時の東京の
家を売って華城(ファソン)への集団移住資金を出すなどもしていた。
しかし80年代初め、一部の活動家や牧師などの堕落に衝撃を受け、日本の富士山向かいにある高峰八ヶ岳の麓に「隠遁」した。現在は飢えた
北の子供たちに援助をしている。

野村牧師のこのような献身活動は、国民日報の報道(※5)で広く知られた。


国民日報クッキーニュース/韓国語(2012/02/13 01:10)

※1 野村基之
京都生まれ、在日韓国人ではない模様。
1957年米国留学中に布教開始、1961年に日本に帰国。
この野村牧師は個人的経験から、韓国への謝罪賠償を行なうべきだと強く主張している。
しかし、関連記事(後述)にて記載の通り、一応冷静な客観視は出来ている模様。

※2 ベタニアホーム
http://www.bethanyhome.net/
プロテスタントの中でも保守的(聖書原理主義的)な立場である「ストーン・キャンベル聖書復帰運動」の流れを汲む単立教会。
単立教会とは、特定の教団・教派に属さない独立色の強い教会。
ストーン・キャンベル聖書復帰運動からは「チャーチ・オブ・クライスト」や「クリスチャン・チャーチ」が生まれている。
聖書原理主義なので広義では「福音派」に属するが、実態としては穏健派なので他宗派にも寛容。

※3 諸廷垢(チェ・ジョング)
1944/03/02-1999/02/09
大学時代から反貧困社会運動や民主化運動で活動し、何度か投獄されている。
当局による貧民街の強制撤去に頑として反対して運動の先頭に立ったため「撤去民の父」と呼ばれる。
「民主憲法争取国民運動本部」の共同代表として、1987年の「六月民主抗争」を主導。
1992年から国会議員。

※4 ウルミテ・ソン・ボンソヌァ(울밑에 선 봉선화)
韓国独自の賛美歌。
タイトルを訳すと「人知れず泣く鳳仙花」といったところか。
韓国の教会では「憂国志士の歌」らしい。

※5 国民日報の報道によって~
国民日報は元来キリスト教系の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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