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Kim Ok-gyun
http://www.sunfield.ne.jp/~keigo/sakuhin/sunaga/sunaga2.html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Y7gp&articleno=2673&_bloghome_menu=recenttext#ajax_history_home
日本では東京や札幌、小笠原諸島などを転々とした後、上海に渡る。1894年3月28日、上海で閔妃の刺客洪鐘宇(英語版)(ホン・ジョンウ)[3]にピストルで暗殺された。遺体は清国軍艦咸靖号で本国朝鮮に運ばれ凌遅刑に処された。その遺体はバラバラにされ、胴体は川に捨てられ、首は京畿道竹山、片手及片足は慶尚道、他の手足は咸鏡道で晒された[4]。
after Tokyo,Sapporo wandered in Ogasawara Islands, crossed to Shanghai.
on March 28, 1894, he was assassinated by pistol of Hong Jong-u who was assassin for queen Min in Shanghai. his body was carried to his mother country Korea on the warship of Qing Dynasty Kansei,be sentenced the sloter imprisonment.
the body was ripped apart the parts, his fuselage was discarded into the river, his head was insulted in Gyeonggi Chukusan, one leg and hand was exposed in Gyeongsang, the other limbs were on the street Hamgyeong.
http://mpva.tistory.com/tag/%EB%8F%85%EB%A6%BD%EC%8B%A0%EB%AC%B8?page=2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3/200403040296.html
김옥균 "오늘밤, 민영익을 못죽이면 내가 죽는다"
[역사다큐 운명의 20년] 갑신정변서 러일전쟁까지
1. 우정총국 파티장- 갑신정변 첫날
입력 : 2004.03.04 17:35 06' / 수정 : 2004.03.05 04:4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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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 운명의 20년
창간84주년특집
1884년 12월 4일. 음력 시월 열이레의 둥근 달이 서울 전동(典洞)의 우정총국을 비추고 있다. 이 밤, 느닷없이 치솟는 불길이 역사의 한 순간을 그을린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정총국은 이날 밤 초대 총판(總辦·대표) 홍영식이 주최하는 낙성식 축하파티로 흥청거렸다.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과 정부 대신들이 각기 다른 꿈의 축배를 올리고 있다. 1876년 일본과 첫 수교를 맺은 이후 조선의 문에는 더 이상 닫아 걸 수 있는 빗장이 없었다. 1882년 미국과 영국·독일에 잇달아 문을 열었고 1884년에는 이탈리아·러시아와 국교를 튼 그때의 조선은 지난달 칠레와 사상 첫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오늘의 한국을 연상시킨다.
지금, 미군기지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용산이 바로 그 해 8월 일본의 요구로 외국인을 받아들일 ‘자유 지대’(開市場)로 문 열었던 것은 역사의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1883년 인천항을 개항하고 이듬해 봄 부산과 나가사키 간 해저 케이블을 막 개통했을 정도로 조선은 급박한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었지만, 정작 나라를 어디로 끌어갈지에선 개화당과 수구당이 ‘속도’와 ‘폭’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반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과 상민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2년 전인 1882년 말의 일이었다. 근대의 빛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 1883년 말 미국 방문 길에 나선 민영익과 개화파 일행이 일본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했던 이들은 일년 뒤 개화의 속도와 방법론을 놓고 동지에서 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부터 서광범·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유길준이 보인다. 앞줄에 보이는 어린이는 당시 게이오의숙에 유학 중이던 박용화다.
“군(君)은 천(天)을 아는가.”
파티에 참석하고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에게 물었다. 그대는 하늘을 아는가. “요로시(좋다)!” 시마무라가 즉각 답했다. 갑신정변 거사의 암구호였다. 좋다, 불길만 솟으면 이제 천하가 바뀌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꿈’들은 그날 파티 자리에서도 은밀히 타오르고 있다. 흥분과 기대,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들. 개화파 젊은 지식인들을 지지했으나 정변에는 협력하고 싶지 않던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 조선의 수상한 기운이 러시아의 확장을 가져올까봐 불안한 영국 영사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 수구파를 손에 넣고 있는 청국영사 천서우탕(陳壽棠), 그리고 정변의 순간을 기다리느라 공사관에서 대기 중인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대신해 참석한 서기관 시마무라, 친청파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박영효와 개화당의 우두머리 김옥균, 바로 그날 밤 개화파의 처단 대상 목록에 올라있는 수구당의 거두 민영익·한규직·이조연도 한 자리에 있었다.
죽여야할 자를 바라보는 김옥균의 눈빛이 깊게 떨린다. 불길이 오르면, 그의 가장 친했던 친구이고 한때는 개화의 같은 꿈을 가졌던, 그러나 지금은 수구당의 가장 젊은 총아가 되어있는 민영익은 죽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의 오래 전 친구가 고통 없이 단칼에 죽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은 거침없이 흐르나, 기다리는 불길은 타오르지 않는다.
열강 틈바구니서 헤맨 20년…100년후 오늘과 '닮은 꼴'
거사의 주역들인 홍영식과 김옥균·박영효는 피가 마른다. 최초의 계획이었던 안동 별궁 방화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기별에 행동대원 유혁로가 급히 말한다. 죽여야 할 사람들은 그냥 이 파티 자리에서 죽여버리자. 김옥균은 실패로 돌아간 별궁 방화 대신 민가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하고, 마침내 창 밖으로 불길이 치솟는다. 포성이 뒤따른다.
파티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외국 영사들과 고위 대신들은 불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장 먼저 불길을 향해 달려나갔던 민영익은 칼에 찔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한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피 위에서 혁명정강을 발표하게 될 갑신정변의 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옥균과 홍영식·박영효·서광범 등 개화당 청년들은 그때 갓 스물셋에서 서른셋 사이였다.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의 신문물을 돌아보고 와 우정총국 총판이 된 홍영식의 나이 고작 스물아홉. 그들은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창간했고 치도국(治道局)과 한성 순경부(巡警部)를 만들어 국가 시스템 정비에 나섰다. 마침내 근대우편제도까지 도입하며 개화당이 얻어내려했던 것은 눈부신 근대의 속도였다. 좌절의 순간까지 멈출 수 없던, 멈춰서도 안 되었던 눈부신 속도.
“모든 평화수단은 끝났소.”
개화당의 맏형으로 꼽히던 서른셋의 김옥균. 1884년이 저물어갈 무렵, 그는 더 이상 수구파와 합의에 의해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김옥균은 개화당이 고종의 마음을 얻었다는 데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무릇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의 대계를 그대가 생각한 계획에 맡길 터이니, 그대는 이에 대해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 말을 글로 쓰고 옥새까지 찍어준 것이 우정총국 낙성식 불과 닷새 전이었다. 김옥균 등은 군주의 마음이 수구파가 아닌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믿었다.
수구파는 청나라의 등에 업혀있었으나, 청은 이미 제 목숨도 지킬 수 없는 늙은 호랑이에 불과했다. 청은 바로 그 해 안남(베트남)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해 그곳의 지배력을 상실해버린 몰락의 제국 아니던가. 그러나 청은 조선에서는 가장 강력한 외세였으며 수구파의 힘이었다. 중도파를 대변하는 김윤식조차 한가롭게 청나라 톈진(天津)을 유유자적하며 신문물을 보고 오겠다고 하지 않는가. 한때 개화당과 절친했던 민영익마저 이들의 초조함과 속도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개화당이 칼끝을 겨누어야 할 수구파의 가장 젊은 대표가 되었다.
왜 하필 일본이어야했는가. 침략자인 것이 분명한, 떠오르는 후발(後發) 제국. 언젠가 조선마저 완전히 삼켜버릴 욕심을 정한론(征韓論)을 통해 분명히 드러냈던 일본의 손을 그들은 왜 잡아야 했는가. 김옥균과 개화당의 눈에 민중의 힘은, 조선 근대화의 자생적 힘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적어도 당시까지는 조선의 정치에 개입할 의지가 없었다. 적어도 그들 눈에는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이 새로운 ‘국가 모델’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사지(死地)에 들어가 있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소, 아니면 먼저 치겠소? 우리에게 길은 한 가지뿐이오.” 김옥균과 개화당이 이날 토로한 진실은, 일본을 등에 업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운명적인 애국충정이다. 적어도 혁명의 전야에는 그러했다.
스스로 밝지 않으면 불길로라도 밝혀야 했던 근대의 빛은, 그러나 아직 불길 뒤편 어둠 속에 있다. 외세를 등에 업은 외세의 배격, 혁명을 위한 무자비한 폭력, 친일의 족적(足跡)들, 마침내 10년 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의 근대화를 제자리에 묶어버린 보수화, 혁명의 실패가 그들에게 덧씌울 오명도 역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백 투 더 퓨처의 정치적 상상력은 아직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 잡느냐, 잡히느냐. 군주를 수중에 차지하고 천하를 잡기 위해 불길 속을 내달릴 뿐이다. 멀미 같은 밤이 숨가쁘게 깊어가고 이른바 3일 천하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작가 김인숙
소설가 김인숙(金仁淑)은 연세대 재학 중이던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로 등단. 한국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작년에 ‘올해의 문장상’(소설부문)을 받았다.
朝鮮の維新志士 Kim Ok-gyun
甲申政変、1884年12月4日(時憲暦光緒十年十月十七日)
The Gapsin Coup (갑신정변, :甲申政變) was a failed 3-day coup d'etat which started on 4 December 1884 in the late Joseon Dynasty of Korea.
Nanjing Massacre Memorial Hall
南京大虐殺紀念館
Independence Hall of Korea 民族独立館 독립기념관
Kou Bunyu (Taiwanese critic)
there is nothing completely with Japanese culture nor historical fact, in "Independence Hall of Korea " and "Nanjing Massacre Memorial Hall" in china.
where are just for the facility of education to anti-Japanese, its are copy of specific "cultural genocide" of China and Korea.
the more cruel (exhibitions), but it indicates that China and Korea is the more cruel country.
.called the Confucianism state , they are most intolerant in politically.
for punishment they try as long as cruelly, for example, the punishments has been lined to write in legislation of the Chinese history, it is or open a hole in the head, be split the body, their fashions are something beyond the language for Japanese.
.the executions for the participants in the dissident movement against Joseon dynasty, it was much higher cruel than the era's when japan governor of Korea. When the leader of The Gapsin Coup (1884),Kim Ok-gyun was assassinated in Shanghai, his neck and torso bodies were disconnected, and his neck was exposed in Han castle (Seoul city).
So Chae-pil,one of the hero in The Gapsin Coup,published "independence newspaper",built "independent church", whose clan,all of his family and relations had been murdered.
.after the war, but to emphasize Chinese scholars and media, massacred a large number of Taiwanese people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in Taiwan, but it is to maintain security at that time it is a measure of course.
KMT government brands it as "massacre" by Japanese, they have taught so well in education.
however in 2.28 (1947)in case of after war, they killed more than the number of innocent people as "massacre" literally for just one week, the number of victims were than in the past 50 years of Japan governor.
黄文雄氏 評論家
・史実とも日本文化とも全く無縁である、韓国の「民族独立館」、中国の「南京虐殺記念館」は、反日教育の施設であり、中韓両国特有の「虐殺文化」の丸写しなのである。残虐であればあるほど、中韓がそれだけ残虐な国であることをあらわしているのだ。
・儒教国家というのは、たいてい政治的には不寛容である。刑罰については残虐極まりなく、たとえば中国法制史に書き連ねられている刑罰には、頭に穴をあけたり、身体を裂いたりと、日本人にとっては言語を絶するものがある。
・李朝時代の反体制運動の参与者に対する処刑は、朝鮮総督時代をはるかに上回って残虐だ。甲申政変(1884年)の指導者、金玉均が上海で暗殺されると、遺体は首と胴体が切断され、首は漢城で晒し物になった。『独立新聞』を創刊し、独立教会の主役になった徐戴弼も甲申政変で一族が惨殺されている。
・台湾でも戦後は中国系の学者やメディアは、日本植民地支配下で大勢の台湾人が虐殺されたと強調するが、それは治安維持のため、当時としては当然の措置である。それを国民党政府は日本人による「虐殺」だと決め付け、教育でもそう教えてきた。しかし彼等は戦後の2.28事件(1947年)で、日本の領台50年間で殺された数を上回る無辜の民を、わずか1週間で文字通り「虐殺」しているのである。
황 후미오(文雄)씨 평론가
·역사적 사실과도 일본문화와도 완전히 무연인, 한국의 「민족독립관」, 중국의 「난징(남경)(Nanjing) 학살 기념관」은, 반일교육의 시설이며, 중한양국특유의 「학살 문화」의 만 복사다. 잔학하면 있을 만큼, 중한이 그것만 잔학한 나라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유교국가라고 하는 것은, 대개 정치적으로는 불관대하다. 형벌에 대해서는 잔학 하기 짝이 없고, 예를 들면 중국 법제사에 죽 써 늘어놓아져 있는 형벌에는, 머리에 구멍을 뚫거나, 신체를 찢거나고, 일본인에 있어서는 언어를 끓는 것이 있다.
·이조시대의 반체제운동의 참여자에게 대한 처형은, 조선 총독 시대를 훨씬 상회해서 잔학하다. 마사루(甲) 신(申) 정변(1884년)의 지도자,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되면, 사체는 목과 동체가 절단되어, 목은 간(漢) 조(城)로 바래 유용하게 되었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교회의 주역이 된 서(徐) 대弼도 마사루(甲) 신(申) 정변으로 일족이 참살되고 있다.
·대만에서도 전후는 중국계의 학자나 미디어는, 일본 식민지지배하에서 많은 대만인이 학살되었다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치안유지 때문에, 당시로서는 당연한 조치다. 그것을 국민당 정부는 일본인에 의한 「학살」이라고 엄하게 책하고, 교육이라도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들은 전후의 2.28사건(1947년)로, 일본의 영대 50년간으로 죽음을 당한 수를 상회하는 무고의 국민을, 불과 1주일로 문자 그대로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http://book.culppy.org/bbs/board.php?bo_table=23_01&wr_id=323&page=7
http://ask.nate.com/qna/view.html?n=5538020
김옥균을 홍종우에 의하여 권총 살해한후 시체를
leejaemin3 | 07.04.22 16:18
답변 1
조회 703
네티즌공감
국내로 들여와서 능지처참 시킨 이유는?그냥 권총으로
쏘앗으면 그만이지 능지처참까지 시킨 이유가 궁금하거든요?
그리고 이후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요?
현재의 김옥균 님의 후손들로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요?
crencia81 님의 답변
07.10.01 15:06
답변공감
갑신정변 실패 후 10여년 동안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은 고국에 농민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가서 정세를 살피려 했다. 그러나 민씨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시체는 와다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의 신병과 김옥균의 사체를 청국에게 넘겼고, 청국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홍종우는 고종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금의환향한 반면 조선에 도착한 김옥균의 사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사체를 능지처참했으므로 정확하게는 육시처참형(戮屍處斬刑))을 당한 후 목이 잘리고 사지가 분열되고 말았다.
잘려진 그의 목은 참혹하게 효수되었고 그의 곁에는 '모반 대역부도 죄인 옥균 당일 양화진두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김옥균을 굳이 능지처참시킨 이유는 그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대역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역모를 저지른 죄인의 경우에는 설사 죽은 후라 하더라도 멸문의 화는 물론이요 그 시체마저도 몹쓸 짓을 당해야 했다. 이러한 예는 조선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연산군에게 고하였고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벤 것 또한 김옥균의 그것과 비근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찢겨진 그의 시체는 이렇게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전시되었다. 비운의 죽임을 당한 김옥균의 시체 한 토막은 장기곶 앞바다에 내던져졌다. 그의 시체를 이곳에 버린 이유는 당시 상황이 동학농민혁명이 한참이었던 때였고 동해에서 튀어나온 이곳의 지형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도처에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는 것이 반란으로 간주되었으며 커다란 근심거리였기에 역적의 시체 일부를 역모의 조짐이 있다는 지역에 유기함으로써 또 다른 역모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주술적인 행위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주역 김옥균은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4세의 한창 때였다.
조선에는 연좌제라는 무서운 형벌이 또한 있었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의 가족들 또한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김옥균의 동생 김각균은 벼슬길에 올라 있었으나 경상도 칠곡으로 도망을 쳤다가 암행어사 조병로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죽었다. 생부인 김병태는 천안 옥사에서 10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다가 눈이 멀었다. 그러나 그도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암살되어 시체로 돌아오던 1894년 4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옥균의 부인 유씨와 딸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도망을 쳐서 10년 동안 비렁뱅이 노릇을 하다가 1894년 박영효가 내무대신이 되어 일본에서 돌아오자 간신히 복권이 되었다.
김옥균은 조선말기의 정치가이며 국가제도의 개혁을 위해 힘썼으며 갑신정변을 통해 근대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였다.독립ㆍ자주ㆍ자립이라는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그는, 이역 땅에서 동족의 손에 암살되는 비운을 맞고 만 것이다. 얼마 후,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보다 더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일본으로 망명해 지내던 박영효는 죄를 용서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김옥균이 살해된 이듬해인 1895년, 조선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이 개화주의자는 반역죄가 사면되었다. 1910년 순종 4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이라는 중직의 벼슬(사후에 내려진 벼슬이므로 추증되었다고 함)과 '충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교되고, 외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기층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 구분된다. 또 조선왕조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갑오경장(고종 31년(1894),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 제도를 근대적 국가 형태로 고친 일)과도 구별된다.
김옥균의 묘는 일본에 2개, 한국에 1개가 있다. 일본에는 아오야마 묘지 외에도 김옥균이 한때 머물렀던 도쿄 진조시에도 하나 더 있다. 한국에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묘지(충남기념물 13호)가 있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고종의 분노가 극에 달해 김옥균의 유해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겨우 머리카락과 의복만으로 무덤을 만들었을 것이기에 세 묘 모두 진짜 묘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 묘들은 모두 가묘인 것이다. 김옥균의 묘가 이처럼 많은 데에는 그의 죽음 후 펼쳐진 파란만장한 사연이 숨어 있다. 조선 조정은 대역죄인이라는 이유로 양화진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하고 목을 효수한 뒤 병사들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했다. 아오야마 무덤은 김옥균을 존경하던 어느 일본인(야다라는 실명이 전해지기도 함)이 유해의 머리카락과 의복의 일부를 몰래 가져가 만든 가묘다. 그리고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야산 기슭의 묘는 김옥균이 죽은 후 양아들이 된 김영진이 1912년 아산군수로 있을 때, 아오야마 무덤의 유발과 의복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다시 가져와 김옥균의 부인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혹은 도쿄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서 흙을 얻어다가 묻은 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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