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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minority in Japan, 1904-1950
戦後、韓国と日本で占領軍に勤務し、在韓日本人の引き揚げとともに在日コリアンの引き揚げ業務に従事し、後にハーバード大学でコリア学を講じたエドワード・ワグナーは、若き日のモノグラフで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
<戦後の日本においては、朝鮮人少数民族は、いつも刺激的な勢力であった。数においては大いに減ったものの、朝鮮人は、依然として実に口喧しい、感情的・徒党的集団である。かれらは絶対に戦敗者の日本人に加担しようとせず、かえって戦勝国民の仲間入りをしようとした。朝鮮人は、一般に、日本の法律は かられ(ママ)に適用され得ないものとし、アメリカ占領軍の指令も同じようにほとんど意に介しなかった。そのため、国内に非常な混乱をおこした。占領当初の数か月、在日朝鮮人炭坑労働者の頑強な反抗のために、日本の重要産業たる石炭産業の再建は障害をこうむった。経済的領域における朝鮮人のいろいろな活動は、日本経済再興への努力をたびたび阻害した。1948年の神戸における緊急事態宣言は、日本の教育制度改革を朝鮮人が妨害した結果、行われたものである。引き揚げについては、占領当局が決定した政策を日本政府の手で実施しようとするのを妨害した。
このような、いろいろな要因および事件のために、日本人・朝鮮人間の伝統的敵対感情は一層深くなっていった。過去と同様に、戦後においても、在日朝鮮人社会は、日本人から不信と軽侮をうけ、また、日本人の一般的不満感のはけ口とされた>(Edward W.Wagner, The Korean Minority in Japan 1904-1950,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1951 日本語訳『日本における朝鮮少数民族』外務省刊、湖北社復刻版、一九七五年、二〜三頁)
<ほとんどすべての朝鮮人の不法行為は、そうした行為を犯罪としてみたとき、普通にもっている意味以上の影響をまきおこした。これは、ある程度は当然、日本の報道機関がそれに必要以上の注意を喚起したことによるものであるが、さらにそれ以上の要素は、小さな事件を派手な訴訟事件にする朝鮮人の性癖であった。朝鮮人を逮捕しようとする際に、違法者とは同じ朝鮮人の血をひいているという以外は、何の関係もない朝鮮人分子がこれに加わって暴徒と化した例はきわめて多い。そのうえ、政治問題に関しての朝鮮人同志の闘争にともなう暴力は、日本人の眼に朝鮮人の無法さをより鮮やかに示さずにはおかなかった。
たとえ、このような事情で朝鮮人の犯罪性が拡大されることがなかったとしても、この犯罪性が日本人・朝鮮人の関係に与えた悪い影響は依然として甚大なものがある。朝鮮人の掠奪行為が、大部分、下層民の日常生活にとってきわめて重要な地域において行われたということもあった。さらに朝鮮人は、日本に不法入国しようとしたが、ときには伝染病ももちこんだという事情もあって、この不安をつよめる実例を提供した。朝鮮人は「悪者」だという心理が、時の流れとともに、日本人の心から薄れていくであろうと信ずべき理由は、なにもないのである>(同書、一三〇頁)
日本人の側から、この時期のコリアンの行為を記したものには、たとえば次のような例がある。新聞の連載記事が単行本化されたものである。
<”もう日本人じゃない” 日本降伏の直後、マッカーサー元帥が厚木に乗り込んでくると、まっ先にこう叫び出したのは在日六十万の朝鮮人たちだった。彼らの多くは戦前出かせぎのため日本に渡ってきたか、あるいは戦時中軍部の徴用で連れてこられたもので、内地における生活がみじめだっただけにこの強気が一度に爆発した。彼らは敗戦国にのりこんできた戦勝の異国人と同じように、混乱につけこんでわが物顔に振舞いはじめた。米でも衣料でも砂糖でも “モノ” が不足していた時代に彼らは経済統制など素知らぬ顔でフルに “モノ” を動かした。当時絶対に手にはいらなかった純綿のハダ着や雑貨、菓子類、ウイスキー、外国の医薬品など彼らのヤミ市では簡単に買うことができた。ヒロポンや密造酒が集散されたのも主としてそこだった。ゴミゴミしたマーケットから金持が続々と生れていった。完全な無警察状態ーー。そのいい例が二十四年春、東京深川でおこった枝川町事件である。朝鮮人四人組が月島の織物問屋から純綿八十二反を盗み出して巨利をせしめた。犯人の身もとがわかり、深川署の刑事ふたりが逮捕状をもって (略)出かけたところ、 (略)逆に “不審尋問” され、袋だたきの目にあった。当時の朝鮮人の鼻息がどんなにすさまじかったか、容易に想像できる。”見まい、聞くまい、振りむくまい” 深川署の刑事たちはそんな言葉で自分たちの無力を嘆じあったという>(毎日新聞社編『白い手黄色い手』毎日新聞社、一九五六年、二九〜三〇頁)
より回顧的にこの時代を語っているのは田中明である。
<敗戦直後の在日朝鮮人は、敗戦国の無力な警察を嘲笑しつつ、暴力と脱法行為で虚脱状態の日本社会を我がもの顔に横行した。超満員の列車から日本人を引きずり下ろして、自分たちが占領するといった光景は、決して珍しいものではなかった。くどくどいうのは控えたいが、その有様は、かつて居留民団の団長をし、本国の国会議員にもなった権逸氏が、著書『回顧録』のなかで「今もその時のことを思い出すと、全身から汗が流れる思いがする」と書いていることから想像して頂きたい。そうした姿は「朝鮮人=無法者集団」という印象を日本人の胸に強く植えつけた。外国人の指紋押捺制度が一九五五年に採用されたのも、上記のことと関連があった。朝鮮人による外国人登録証明書の不正受給や偽造変造があまりにも多かったのである。密航者のための登録証偽造や、実在しない人間の登録証を役所に作らせて(脅迫や買収がからむ)それを売ったり、そうした幽霊人口によって得た配給食料をヤミ市場に流すなど、さまざまな不正があった>(「一日本人の見た戦後日韓関係」『現代コリア』一九九二年一二月号)
전후, 한국과 일본에서 점령군에 근무하고, 존재한일본인의 철수와 함께 재일 코리안의 철수 업무에 종사하고, 뒤에 하버드 대학에서 코리아학을 강구한 에드워드·바그너는, 젊을 때의 모노그래프(monograph)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후의 일본에 있어서는, 조선인 소수민족은, 언제나 자극적인 세력이었다. 수에 있어서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조선인은, 여전히 실로 마구 지껄인, 감정적·도당적 집단이다. 그들은 절대로 전패자의 일본인에게 가담하자로 하지 않고, 도리어 전승 국민의 한패가 됨을 하자로 했다.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법률은 걸려들어 (엄마)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미국 점령군의 지령도 같이 대부분 개의 하지않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국내에 대단한 혼란을 일으켰다. 점령 당초의 몇개월, 재일 조선인 탄광노동자가 완강한 반항을 위해서, 일본의 중요산업된 석탄산업의 재건은 장해를 받았다. 경제적 영역에 있어서의 조선인의 여러가지 활동은, 일본경제재흥에의 노력을 자주 저해했다. 1948년의 고베(神戶)에 있어서의 긴급사태선언은, 일본의 교육제도개혁을 조선인이 방해한 결과, 행하여진 것이다. 철수에 대해서는, 점령 당국이 결정한 정책을 일본정부의 손으로 실시하자로 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 및 사건을 위해서, 일본인·조선 인간의 전통적 적대 감정은 일층 깊어져 갔다. 과거 동일하게, 전후에 있어서도, 재일 조선인 사회는, 일본인으로부터 불신과 경멸을 받고,또, 일본인의 일반적 불만감의 배출구로 여겨졌다> (Edward W. Wagner, The Korean Minority in Japan 1904-1950,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1951일본어이유(번역) 『일본에 있어서의 조선 소수민족』외무성간, 후베이사 복각 판, 1975년, 2? 3페이지)
<대부분 모든 조선인의 불법 행위는, 그러한 행위를 범죄로서 보았을 때, 보통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이상의 영향을 일으켰다. 이것은, 어느정도는 당연, 일본의 보도기관이 그것에 필요이상의 주의를 환기한 것에 의한 것이지만, 더욱 그 이상의 요소는, 작은 사건을 화려한 소송 사건으로 하는 조선인의 버릇이었다. 조선인을 체포하자로 할 때에, 위법자와는 같은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라고 하는 이외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조선인 분자가 이것에 겹쳐서 폭도와 화한 예는 지극히 많다. 게다가, 정치문제에 관한 조선인 동지의 투쟁에 따르는 폭력은, 일본인의 눈에 조선인의 무법임을 보다선명하게 내보이지 않고는 두지 않았다.
가령,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인의 범죄성이 확대되는 적이 없었다고 한들, 이 범죄성이 일본인·조선인의 관계에 준 나쁜 영향은 여전히 막대한 것이 있다. 조선인의 약탈 행위가, 대부분, 하층국민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지역에 있어서 행하여졌다고 할 것도 있었다. 더욱 조선인은, 일본에 불법입국하자로 했지만, 때로는 전염병도 가져왔다고 하는 사정도 있어서, 이 불안을 강화하는 실례를 제공했다. 조선인은 「나쁜 놈」이라고 하는 심리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일본인의 마음속으로부터 엷어져 갈 것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동서, 130페이지)
일본인의 측에서, 이 시기의 코리안의 행위를 기록한 것에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신문의 연재 기사가 단행본화된 것이다.
<” 이미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 항복의 직후, 맥아더 원수가 아쓰기(厚木)에 올라타 오면, 맨 먼저에 이렇게 외치기 시작한 것은 재일 60만의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전전 객지벌이 때문에 일본에 건너왔는가,혹은 전시 중 군부의 징용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으로, 내지에 있어서의 생활이 비참했던 것 만큼 이 강세가 한번에 폭발했다. 그들은 패전국에 올라타 온 전승의 이국인과 같이, 혼란에 담가서 우리물건얼굴에 행동하기 시작했다. 미(쌀)이라도 의류라도 설탕이라도 “상품”이 부족한 시대에 그들은 경제통제등 시치미 떼다 얼굴로 최대한 “상품”을 옮겼다. 당시 절대로 입수 가능하지 않았던 순면의 【하다】도착이나 잡화, 과자류, 위스키, 외국의 의약품등 그들의 암 시에서는 간단히 살 수 있었다. 히로뽕이나 밀조주가 집산된 것도 주로 해서 거기이었다. 너저분하게 한 마켓에서 부자가 속속 태어나 갔다. 완전한 무경찰상태――. 그 좋은 예가 24년 봄, 도쿄(東京) 후카가와(深川)로 일어난 에다가와초(枝川町) 사건이다. 조선인 사인조가 쓰키시마(月島)의 직물도매상에게서 순면 82탄을 훔쳐내서 큰 이익을 감쪽같이 가로챘다. 범인의 몸 원래를 알고, 후카가와(深川)서의 형사 두사람이 체포장을 가져서 (거의) 나간 바, (생략) 반대로 “불심 검문” 되어, 뭇매의 경험을 했다. 당시의 조선인의 콧김이 어떻게 굉장했는가,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다. ” 병문안하고, 듣지 않을 것인, 뒤돌아보는 춤 추어” 후카가와(深川)서의 형사들은 그런 말로 자기들의 무력을 서로 한탄했다라고 한다>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사 편 『흰 손 노란 손』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사, 1956년, 29? 30페이지)
보다회고적으로 이 시대를 함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다나카(田中) 아키라(明)다.
<패전 직후의 재일 조선인은, 패전국이 무력한 경찰을 조소하면서, 폭력과 탈법 행위로 허탈 상태의 일본 사회를 우리물건 얼굴에 횡행한았다. 초만원의 열차로부터 일본인을 질질 끌어 내리고, 자기들이 점령한다고 한 광경은, 결코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중얼 중얼 말하는 것은 삼가하고 싶지만, 그 모양은, 예전에 거류민단의 단장을 하고, 본국의 국회 의원도 된 권 마사루(逸)씨가, 저서 『회고록』의 안에서 「지금도 그 때를 상기하면, 전신으로부터 땀이 흐르는 생각이 든다」라고 쓰고 있는 것부터 상상해 주셨으면 싶다. 그러한 모습은 「조선인=무법자집단」이라고 하는 인상을 일본인의 가슴에 강하게 이식했다. 외국인의 지문날인 제도가 1955년에 채용된 것도, 상기의 것과 관련이 있었다. 조선인에 의한 외국인등록증명서의 부정수급이나 위조 변조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밀항자를 위한 등록증 위조나, 실재하지 않는 인간의 등록증을 관공서에 만들게 해서 (협박이나 매수가 얽힌다) 그것을 팔거나, 그러한 유령인구에 의해 얻은 배급 식료를 암 시장에 흘려보내는등, 다양한 부정이 있었다> (「1일본인이 본 전후 일한 관계」 『현대 코리아』1992년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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