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식행사 후,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화 관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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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명성황후는 쌍꺼풀 미인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06.07.19 12:12 / 수정 2006.07.20 00:14
'조선국귀현초상' 원본 캐나다 토론토서 발굴
1894년 일본 신양당에서 발행한 '조선국귀현초상'
1번 사진에서 명성황후만 확대한 것
프랑스 주간지 <일루스트라숑(L'illustration)> 1985년 11월2일자 표지 사진. 사진이 작고 흐리지만 1번 사진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몇 개 나온다
프랑스 주간지 <일루스트라숑(L'illustration)> 1985년 11월2일자 내지 사진. 1번 사진보다 선명해 쌍꺼풀까지 드러난다
<월간중앙> 2005년 5월호가 명성황후의 젊은 시절을 추론하며 발굴 보도해 주목받은 사진, <조선일보> 1935년 신년 특별호 게재분이다
명상황후의 얼굴을 담은 대한제국 황실 거족초상화가 발견됐다.
월간중앙은 18일 발매한 8월호에서 명성황후(王妃閔氏라고 기재).고종.대원군이 실린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이라는 한자 제목의 초상화집을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굴해 공개했다. '귀현'은 '지위가 높고 귀하며 이름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55cm, 세로 40.4cm.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임을 육안으로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테두리를 띠 장식으로 꾸민 그림 아래쪽에는 옛날 필법의 작은 한자로 발행.인쇄 시기, 주소, 작가, 출판사명 등이 나와 있다.
메이지(明治) 27년(1894) 일본에서 제작된 이 초상화는 지난 6월 초순 캐나다 토론토의 중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송광호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이 찾아낸 것이다. 이 물건은 발견 당시 경매시장에 나가기 직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장자인 중국인은 이 그림의 출처에 대해 6년 전쯤 미국 보스턴의 스키너경매장에서 구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상화에 그려진 명성황후의 얼굴은 선명한 쌍꺼풀의 눈 등 얼굴은 전체적으로 미인형이었다. 초상화의 오른쪽 밑에는 '板權所有明治二七年九月十日印刷同年同月十日發行'(판권소유 메이지 27년(1894) 9월10일 인쇄 동년동월 10일 발행)이라고 적혀 있다. 인쇄와 발행일자가 9월10일로 같다. 그림에 쓰인 발행 연월일 대로라면 시점이 명성황후 서거 13개월 전이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8일의 일이었다.
아래 중간 부분에는 '印刷畵作兼發行者東京京橋區北楨拾貳番地'(인쇄화작겸 발행자 도쿄 경교구 북정 12번지 타치카와 요시(기치)치로)라며 인쇄화작겸발행자를 밝혀 놓았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인쇄소(印刷所)가 밝혀져 있는데 '東京麴町區有樂町三町目信陽堂'(도쿄 국정구 유락정 삼정목 신양당)으로 나타나 있다.
이 초상화와 거의 유사한 그림이 2001년 국내에서 공개돼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출처는 프랑스 <일루스트라숑(L'illustration)> 1985년 11월2일자. 그러나 그 그림은 이번 초상화와 달리 명성황후와 고종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선명도에서도 이번 초상화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이번 초상화는 발행 시기도 1년여 앞설 뿐더러 선명도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편이어서 <일루스트라숑> 판의 원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명성황후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이태진(64.국사학) 교수는 "이 초상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사진이나 그림 중 연대가 가장 앞서고 일본에서 나온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초상화의 작가 이름까지 밝혀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고, 일본 출판사가 세 인물을 한 장의 그림에 담아 띠 장식으로 보급판을 낸 것도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어 "1894년 당시는 일본 삽화가들이 조선 궁궐을 내왕하던 시기였다"며 "왕비 머리에만 비녀를 두 개 꽂을 수 있어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임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하나 더 나왔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서강대 이종욱(61.사학) 교수는 "명성황후 생전에 발행.인쇄된 초상화에서 다른 두 사람(고종과 대원군)의 초상화는 맞는데 황후 초상만 다른 얼굴로 조작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가장 오래된 명성황후 초상화가 틀림없다면 의미가 무척 크다"고 진본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정반대의 견해도 있다. 한영우(68.국사학) 한림대 특임교수는 "조선시대 의식(衣飾) 연구 전문가로서 이 초상화에 나타난 옷과 가발은 왕비 복장이 아니며, 명성황후 인상도 당시 43세의 얼굴치고는 너무 젊다"면서 "진짜 명성황후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한 교수는 또 "초상화는 왕과 대신들만 그리며 절대로 반신상은 그리지 않는다"는 조선시대 관행을 강조했다. 그는 "발행 연대를 명성황후 생전인 1894년으로 표기한 것은 당시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문형(71)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역시 "(초상화) 발행 연대는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상황설명이 없어 명성황후라고 확신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익명의 한 역사학자는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 수 개월에 전이었고, 그 전 해인 1894년에는 오히려 명성황후와 일본이 가까운 관계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초상화는 명성황후 진영으로 판단된다"고 추정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미술 감정사(鑑定士)로 이름 높은 한 고화(古畵) 전문가는 "이 조선 황실 초상화는 사진이 아닌 높은 기술 수준의 오리지널 리토그라프(Origin. Lithograph.석판인쇄)로 찍어낸 가치 있는 희귀한 작품"이라고 분석했다.
앞서 언급한 '인쇄화작겸 발행자'의 의미를 두고 이태진 교수는 "세 사람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개화기에 국내에 첫 사진관(촬영국)이 등장한 것은 1883년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진이 일반화하지 않은 까닭에 황실에는 초상화.삽화 작가들이 그린 작품이 많았다.
이 초상화는 그동안 발견된 명성황후의 사진과 초상화 등에 대한 오랜 진위 여부 논쟁에서 진일보한 해결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명성왕후에 대한 학계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여주문화원의 조성문(49) 사무국장은 "당시 고종 황제조차 부인인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지 못했는데 누가 찾을 수 있겠느냐? 우리는 (명성왕후) 사진은 없는 것으로 이미 결론지은 상태"라면서도 "이번 초상화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관심을 표명했다.
<해설> '조선국귀현 명성황후 초상' 어떤 의미를 갖나?
<월간중앙>은 지난해 4월 명성황후 사진 3장을 새로 발굴해 5월호(268 ̄273쪽)에 게재했었다. 물론 사진은 이미 나와 있거나 게재된 이후 잊힌 것들이었다. 당시 사진 발굴을 지원한 서지학자 김종욱 씨는 "지금까지 명성황후 사진 논쟁은 겉핥기 수준에 불과했다"면서 "기존 사진을 재차 확인하고 재조명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에 발견된(1894년 간행) '조선국귀현초상'에 등장하는 명상황후의 모습이 딱 그런 경우다.
이 사진은 이미 우리 눈에 익숙한 것이다. 프랑스의 주간지 <일루스트라숑(L'illustration)> 1985년 11월2일자에 빌타르 드 라게리 기자의 '한국의 비극'이라는 기사에 실린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옷의 디자인과 맵시까지 어느 것 하나 틀린 부분이 없다. 때문에 <일루스트라숑>이 이 초상화를 보고 그림을 그렸거나 복사했을 공산이 높다.
2001년 <일루스트라숑>의 명성황후.대원군.고종의 초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국내 연구자들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대원군.고종이 실제 얼굴과 같다는 점에서 명성황후의 것도 실제 얼굴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희미하던 명성황후의 얼굴이 극히 선명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공개됐다. 다만 두 초상화는 2 ̄3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하나는 <일루스트라숑>에서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고종 사이 가운데 상단에 올라 있는데, 이번 '조선국귀현초상'에서는 왼쪽에 배치돼 있는 것. 다른 하나는 전자의 경우 초상화 묘사 상태가 워낙 희미해 얼굴 형상을 확인하기 어려우면서 다소 고령으로 그려진 반면 이번에 발견된 초상화에서는 쌍꺼풀 등이 나타나 있을 정도로 얼굴 전체가 선명하게 묘사돼 있으면서 젊다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두 사진은 비녀가 있고 없음으로 갈라진다는 점이다. '조선국귀현초상'의 명성황후 머리에는 2개의 비녀가 선명하게 꽂혀 있는데 <일루스트라숑>의 초상에는 비녀가 아예 없다. 이는 프랑스 초상화가가 그림을 옮겨 그리면서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아 빼 버린 것으로 추론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기 힘들다.
이 초상화를 발굴해 기사를 쓴 송광호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의 광범위한 전문가 취재에서 드러나듯 명성황후 사진 및 초상화 논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이다. 사진의 존재 유무 자체에 대한 이견에서부터 얼굴의 진위까지 찬반론에 부닥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선명한 초상화가 결국 그간 논란의 핵심이었던 '궁녀냐, 명성황후냐'의 바로 그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추론이나 주장에 맞닥뜨리면 맥이 빠질 정도다. 쌍꺼풀 등은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상상력에 따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명성황후의 사진 및 초상화와 관련해 가능한 논쟁은 거의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비슷한 논란을 반복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번 자료의 발굴 의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앞서 분석한 2 ̄3가지 차이를 감안하면 전혀 다른 사진을 근거로 초상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다시 불거질 명성황후 사진 논쟁을 통해 더 실체에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월간중앙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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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は二重美人だった」
2006年07月19日15時45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comment0mixihatena0
明成皇后(1851~1895)の顔が描かれた朝鮮(チョソン、1392~1910)末期の皇室家族の肖像画が発見された。
月刊中央は、18日に発売した8月号で、明成皇后(王妃閔氏と記載)、朝鮮26代王の高宗(コジョン)、大院君(テウォングン)が描かれた「朝鮮国貴顕肖像」というタイトルの肖像画の画集をカナダ・トロントで発掘した、と公開した。大きさは横55センチ、縦40.4センチ。保存の状態が良好なほうであることが肉眼で確認できる。絵の下の部分には、漢字で発行・印刷した時期・住所・作家・出版社などが記されてある。
明治27年(1894)日本で制作されたこの肖像画は今年6月上旬、トロント在住の中国人が所蔵していたものを、江原(カンウォン)道民日報のソン・クァンホ北米特派員が見つけたもの。発見した当時、競売市場に出る直前だったもようだ。所蔵者の中国人は、この絵の出所について約6年前に米ボストンの競売会社スキナーで購入した、と説明している。肖像画に描かれた明成皇后ははっきりとした二重など美しい顔だち。
肖像画の右下には「板権所有・明治二七年九月十日、印刷・同年同月十日に発行」と記されてある。印刷・発行日が9月10日で同じだ。記された発行日通りならば明成皇后が死去する13カ月前だ。明成皇后が日本人によって殺害された「乙未事変」は、1895年10月8日のことだった。下の中間あたりには「印刷画作兼発行者・東京京橋区北楨拾弐番地・タチカワヨシ(キチ)チロウ」となっている。
絵の左下には、印刷所が「東京麹町区有楽町三町目信陽堂」と記されてある。明成皇后研究の権威者、ソウル大・李泰鎭(イ・テジン、64、国史学)教授は「この肖像画はこれまで発見された写真や絵のうち年代が最も早く、日本から出てきた資料との点から大きな価値がある」と述べた。
また「作家の名前まで分かった場合は初めて。日本の出版社が3人の人物を1枚の絵に盛り込み帯の装飾などをして普及版を作っていたのも初めて確認されたもの」と指摘。李教授は、続いて「1894年当時は日本のイラストレーターが朝鮮の宮廷を往来していた時期」とし「王妃の髪にのみカンザシをさすことができたことから、明成皇后であることを示すもう一つの資料、と考えられる」と評価した。
しかし、正反対の見方もある。翰林(ハンリム)大学・韓永愚(ハン・ヨンウ、68、国史学)教授は「朝鮮時代の衣装研究専門家として、肖像画の服とカツラは王妃の服装ではなく、明成皇后の印象も当時43歳の顔にしては若すぎる」とし「明成皇后ではない」と断定。また「肖像画は王と大臣だけを描き、決して半身の肖像は描かない」という朝鮮時代の慣行を強調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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