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kweon6628/JOgb/98?docid=1CgBEJOgb9820080309193930
내명부와 외명부의 품계
왕비의 법복 '적의'
●궁녀들의 품계를 내명부라 하는데 같은 품계라도 정품과 종품으로 위 아래가 나뉩니다
→정1품 : 빈 (~빈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희빈, 경빈, 창빈...)
→종1품 : 귀인
→정2품 : 소의
→종2품 : 숙의
→정3품 : 소용
→종3품 : 숙용
→정4품 : 소원
→종4품 : 숙원(이상은 후궁인데 왕을 섬기는 일 외에도 공식적인 역할로 왕비를 보좌합니다)
→정5품 : 상궁(중전을 인도, 상기와 전언 통솔) 상의(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 맡음, 전빈과 전찬 통솔)
→종5품 : 상복(의복과 수로 무늬놓은 채장을 공급, 전의와 전식 통솔) 상식(음식과 반찬을 준비, 사선과 전약 통솔)
→정6품 : 상침(왕의 의식주 진행, 사설과 전등 통솔) 상공(여공의 과정, 사제와 전채 통솔)
상정(궁녀의 품행과 직무단속 및 죄를 다스림)
→종6품 : 상기(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 수규, 수칙(세자궁 소속)
→정7품 : 전빈(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 잔치, 왕이 상을 주는 일 등)
전의(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 전선(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듦)
→종7품 : 전설(장막을 치고 돗자리를 준비하며 청소하는 일과 물건을 베풀어 놓은 일)
전제(의복 제작) 전언(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 역할)
장찬(세자궁 소속) 장정( 세자궁 소속)
→정8품 : 전찬(빈과 같음) 전식(머리 감기, 화장, 세수, 머리빗는 일) 전약(처방에 따라 약을 달임)
→종8품 : 전등(등불과 촛불을 맡음) 전채(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
전정(궁관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일 도움) 장서(세자궁 소속) 장봉(세자궁 소속)
→정9품 : 주궁, 주상, 주각, 주변치(악에 관한 일)
→종9품 : 주치, 주우, 주변궁(음악에 관한 일) 장장, 장식, 장의(세자궁 소속)
이상이 내명부 품계입니다
물론 대왕대비 이하 (왕대비가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대비, 중전도 내명부에요. 하지만 품계는 없습니다. 그 이유까진 잘 모르겠으나 감히 추측하건데 품계를 논할 수 없는 분들이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그리고 드라마에서와 같이 정5품 상궁이라 해서 다 같은 상궁은 아닙니다. 제조상궁, 부제조상궁, 감찰상궁, 최고상궁, 지밀상궁 등 이름부터 하는 일까지 세세히 다 나뉘어져 있답니다. 또 왕의 승은을 입었지만 회임하지 못한 여인은 특별상궁(승은 상궁)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이 또한 제조상궁에서 최고상궁 정도까지만 말을 편하게 하며, 그것도 아주 낮춤말은 할 수 없답니다. 후궁이라도 되는 날이면 제조상궁조차도 높여 말해야 함은 당연지사구요. 그건 왕과 동침한 여인이며 언제든 회임 사실이 나타날 수 있는 여인이기 때문이죠
※뛰어난 재주를 가졌지만 의녀는 궁녀가 아닌 관비입니다
※유의할 점이 있다면 종1품 귀'비'가 아니라 귀'인'입니다. 귀비란 칭호는 고려시대와 조선 태종대까지, 그리고 중국 당나라 때(양귀비 아시죠?)의 후궁 품계 중 으뜸가는 것이고 우리의 귀비란 품계는 조선왕조 태종 이후 '빈'으로 바뀌며 격상되었다고 합니다
친잠례가 재현되고 있다.
친잠례는 왕후가 친히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양잠의 본을 보여 비단생산을 장려해온 조선왕조 오례의에 속한 왕비주도의 궁중의례이다.
이날 연극배우 윤석화씨가 왕비로 출연해 풍잠을 기원하며 작헌의식을 행하고 있다.
●반면에 양반가 여인들의 품계,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 여인들은 문무관과 왕족의 아내인데요... 이는 외명부라 하는데 이 또한 정품과 종품으로 다시 나뉩니다
품계 : 왕족의 아내 / 문무관의 아내
정1품 : 부부인 / 정경부인
종1품 : 군부인 / 정경부인
정2품 : 현부인 / 정부인
종2품 : 현부인 / 정부인
정3품 : 신부인 or 신인 / 숙부인 or 숙인
종3품 : 신부인 or 신인 / 숙부인 or 숙인
정4품 : 혜인 / 영인
종4품 : 혜인 / 영인
정5품 : 온인 / 공인
종5품 : 온인 / 공인
정6품 : 순인 / 의인
종6품 : X / 의인
정7품 : X / 안인
종7품 : X / 안인
정8품 : X / 단인
종8품 : X / 단인
정9품 : X / 유인
종9품 : X / 유인
이상이 외명부 품계이구요...
※정종3품 왕족 아내의 품계 중 신인은 훗날 숙인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종6품 이하 왕족의 아내(없었을 거란 추측은 있지만)는 명칭이 없습니다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가 정2품까지이므로 무관의 아내 중엔 정경부인이 없다는 얘기겠지요. 더구나 문관이라 하여도 수많은 관직 중 정1품은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영돈령부사, 영홍문관사, 도제조만... 종1품은 좌찬성과 우찬성만 해당되므로 그야말로 정경부인 되기도 하늘의 별따기였답니다
※궐밖의 여인 중(주로 아이를 못 갖는 왕족이나 사대부의 처)왕이나 그 자녀를 키워준 사람, 즉 유모 격인 여인은 왕족의 서모란 개념을 둬서인지 따로 정해진 품계는 없지만 봉보부인이라 하여 존대를 받는 대상입니다(그 여인이 궐 안 상궁이라면 보모상궁이라 불리구요. 승차해서 상궁이 봉보부인이 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종1품 외명부로 바뀌구요)
4일 서울 성북동 선잠단지에서 열린 선잠제례 행사에서 조선시대 왕비행차가 재현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선잠제는 누에고치 생산이 잘 되도록 기원하는 제례로 1908년 중단됐다가 1993년 다시 시작돼 올해로 14회째를 맞고 있다.
http://www.lifeinkorea.com/cgi-bin/picturesk.cfm?Filename=swf
축제: 친잠례1
업데이트: 2000.10.30
아래의 사진을 클릭하시면 확대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친잠례
1924년까지만 해도 왕궁에서는 국내 비단 산업의 진흥을 위해서 창덕궁에서 왕비의 참석하에 뽕잎을 누에에게 먹이고, 최고의 비단을 뽑아 왕에게 바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마지막 행사가 1924년 윤비(尹妃)에 의해 열렸는데 최근 이 행사를 문헌에 따라 복원하여 200여명의 여성들이 궁중복을 입고 재현한 것입니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10/10/200610100500008/200610100500008_3.html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세종, “왕세자빈은 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다워야…”
배우 윤석화씨가 왕비로 출연해 궁중 친잠례를 재현하는 광경. 친잠례는 궁궐에 쌓은 친잠단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의식이다. 이로써 풍년을 기원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왕의 대리인이자 다음 왕 지명자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내외법이 엄격하게 지켜져 왕비가 국가행사에 참석하거나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졌다. 그 대신 궁내에 정부 관리의 부인들을 초대해 친잠례, 양로연 등의 행사를 치렀고, 정계의 움직임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관리의 부인들과 정치를 논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왕을 통해 혹은 관리의 부인들을 통해 정치적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국가에 재난이 닥치면 왕비가 국모로서 백성의 아픔을 보듬었다. 현종 비 명성은 나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쌀과 옷감을 해당 관서에 보내 백성을 구호하는 데 쓰도록 했으며, 순조 비 순원은 왕실 재산 중 은 1500냥을 가뭄이 든 지방으로 보냈다.
왕이 궁을 비울 경우엔 왕비가 왕 노릇을 대신했다. 고종 비 명성황후가 비밀리에 러시아로 밀사를 보낸 사실이 일본에 발각되어 살해당한 것은 왕비가 특명을 내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국가의 수장으로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성황후처럼 직접 정치에 관여한 왕비는 드물고, 대개 왕으로 하여금 친정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여 그들을 통해 왕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왕비의 마지막 권한은 왕이 죽었을 때 다음 왕을 결정하는 것이다. 명종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고 죽자 영의정 이준경은 “중전이 마땅히 정해야 한다”고 말했고, 중전 심씨는 덕흥군의 제3자를 왕으로 결정했다. 선조가 죽었을 때는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즉위에 반대, 왕의 인장을 시신을 모신 빈청에 두고 정부요인들에게 비밀리에 서한을 보내 영창대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왕비는 왕이 죽으면 금보(金寶·왕의 공식적인 인장)와 계자(啓字·일반 국가 서류에 왕의 결재를 알리기 위해 찍는 인장)를 갖고 있다가, 이를 다음 왕에게 전함으로써 다음 왕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왕비와 후궁의 살벌한 관계
태종 치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궁인 무작의 어머니가 병이 났으나 약을 쓸 재력이 없어 귀신에게 빌 뿐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이 무작을 불쌍히 여기고 궁중에 있던 옷감 10여 필을 내줬는데, 중궁이 궁중의 물건이라며 도로 빼앗은 것. 이는 왕비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왕이라 해도 왕실 살림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왕비는 형벌로 궁인을 다스리기도 했는데, “연산비가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왕비가 궁궐 안살림의 전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권세가의 딸이나 왕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궁들은 비록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왕의 사랑을 믿고, 혹은 정부의 관리들과 결탁해 왕비를 모함하거나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이 임진왜란 때 평양에 머물던 중 자신이 먹고 난 상을 대신들에게 물리자 정철이 “정철이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의 퇴선을 먹겠느냐?” 하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본래 자신이 먹고 난 상을 신하에게 물리는 건 왕과 왕비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빈 김씨가 이같이 행동한 것은 스스로 왕비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 때엔 왕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왕비 장렬왕후를 별궁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궁에서 왕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인현왕후가 폐해졌다가 다시 왕비가 된 후, “갑술에 내가 다시 왕비가 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희빈을 다른 빈들과 다르게 대하고, 궁중인들이 모두 희빈을 더 중하게 여겼으며, 옛 법규에는 빈에 속한 시비가 대내 근처에는 감히 드나들지 못하는데 희빈 소속 시녀들이 항상 왕래하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일까지 있으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금하지 못하니 한심해도 어찌하겠는가”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궁궐에서 계속 왕비를 업신여기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고 알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폐비가 8명이나 되며,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로 된 예가 7명이다. 왕비가 궁궐 내 살벌한 암투와 음모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게 생활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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