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uetown.co.kr/new/htm/menu25.htm
잠업은 기원전 BC 2560년경 중국의 3황(皇) 5제(帝)시대 황제(皇帝)의 원비 서릉(西陵)씨가 정원릉 산책하던 중에 우연히 누에가 고치를 지어 놓은 것을 보고 그 이용방법을 강구한 것을 잠업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설은 1926년 중국의 산서성 장안근처에서 얀사오시대 (BC2500년경)의 유적발굴에서 견각(누에고치의 껍질)이 발견됨으로 잠업의 기원을 신석기 시대로 보기도 한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단군조선시대에 잠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4000년 이전에 양잠을 한 것으로 본다.
무진(戊辰)원년(BC 2333) 바야흐로 신시(神市)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비서갑의 하백녀를 후(后)로 삼고 누에고치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대평치세를 이루었다.
경자(庚子) 93년 (BC 2241) 단제(檀帝)께서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고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먹고 남은 것을 나라살림에 보태었다.
신축(辛丑) 원년 (BC 2240) 단제(檀帝)께서 도랑을 파고 고치며, 농사를 짓고 뽕나무 심는 것을권장하였다.
mochi thinking
韓国では海流について教えていないようです。
海のシルクロード、フィリピン、ベトナムからの船はエンジンがなければ、海流に流されて朝鮮半島にはたどりつけません
it is seemed that they are not tought about ocean currents in Korea .
from Philippines or Vietnam, how could reach to the Korean Peninsula by sail boat flowed into the ocean current.
삼한에 대한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통전(通傳)의 기록을 보면,
마한(馬韓 : 충청, 경기, 황해도)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면(綿)의 이종(移種)에 적당하고 잠상(蠶桑)에 풍요하다.
진한(辰韓 : 경상도)은 잠상(蠶桑)을 지(知)하고 겸포(?布)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농상(農桑)”이라 일컫는 양잠을 백성들에게 권장하였으며, 백제 초고왕(AD 199)때 양잠과 직조법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특히, 직조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누에고치를 이용하여 생산한 비단은 아주 큰 교역 물목이 되기도 하였다.
한층 발전된 우수한 비단생산이 가능해졌고, 귀족계층의 확대로 비단이용이 늘어났으며,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양잠을 장려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특히, 인종 5년 (1127)에 중국 송나라 손광현이 편찬한 잠서(蠶書)를 임경화(林景和)가 이두로 풀이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농업서적인 잠경주해(蠶經註解)를 펴내서 누에치는 법을 보급하였다.
초보수준에 머무르던 양잠기술이 조선이 건국되면서, 양잠에 관한 여러 가지 법제도를 만들어 강력한 권잠정책을 펼쳤고, 잠서의 간행으로 양잠기술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조선시대의 양잠은 농가부업으로 전국에 확산되면서 산업화 되었다.
조선초기 왕들은 농상(農桑)을 의식(衣食)의 근원이라 하여 국가정책으로 적극 권장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면직업(綿織業)과 함께 국가중심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태조는 종상지법(種桑之法)을 제정하여 양잠을 권장하였고, 정종 2년에는 잠신에게 선잠제(先蠶祭)를 거행하였으며, 태종 11년에는 후비친잠례(后妃親蠶禮)를 명하여 행하도록 하였으며, 공상잠실법(公桑蠶室法)을 제정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세종 5년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에 뽕나무를 심게하고 친잠례 거행과 각도에 잠실을 설치하여 잠실도회에서 양잠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성종, 중종을 비롯한 조선 역대 왕들도 권잠 정책을 펼쳤으며, 왕비친잠행상를 계속하고, 잠상에 관한 도서를 간행하였다.
지금도 창덕궁에는 왕비가 친잠을 하며, 양잠을 권하던 어친잠실(御親蠶室)이 보전되어 있고, 그 주변과 경복궁에는 당시에 심어진 아름드리 뽕나무가 자라고 있어 이를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의 최고 수출 효자 산업인 잠업은 국가경제 개발에 크게 기여하여 왔으나, 1976년을 정점으로 매년 감소하여 1991년~1994년 UR협상타결로 누에고치 및 생사류 수입이 개방되어, 국제적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1995년 공교롭게도 전국적으로 사육한 누에가 농약피해로 인해 누에고치를 짓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여 전통섬유산업으로서 4천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잠업은 “입는 실크 산업”에서 “양잠 기능성 식품산업”으로 변화를 모색하여, 현재는 누에가루, 동충하초, 뽕잎, 오디, 실크아미노산, 수누에번데기 등 양잠산물의 기능성을 이용한 식품산업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화장품, 비누, 샴푸 등 미용산업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전통섬유산업으로서 잠업이 잠시 주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나라의 비단(SLIK) 역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入古出新(입고출신)”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가 깊고, 전통이 있는 비단을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들로 다시 한번 그 가치를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다.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0073&mode=all&query=%BF%D5%BA%F1%C0%C7+%C4%A3%C0%E1%B7%CA&dircode=0
조선시대의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는데, 왕비가 행하는 친잠례(親蠶禮)는 특히 여성 노동을 상징하였다. 남성들이 밭에 나가 땅을 갈고 먹을것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입을 것을 생산하였다.
길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다. 봄에 부지런히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그 실로 가을에 좋은 비단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 왕비가 내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蠶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이 바로 친잠례였다. 이 의식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3월에 친경례(親耕禮)와 함께 시행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잠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전국에 잠실을 두었는데, 한양에도 동잠실과 서잠실 등을 두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에 설치한 잠실을 내잠실(內蠶室)이라고 하였는데, 왕비는 주로 이곳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친잠례를 행하기 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선잠은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黃帝)의 부인 서릉(西陵)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서릉이 처음으로 양잠을 하였으므로 누에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선잠을 모신 곳이 선잠단(先蠶壇)인데, 조선 초기에 동소문(東小門:혜화문)밖에 있다가 후에 선농단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선잠단에 올리는 제사는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중사(中祀) 규모였다.
선잠단에 제사를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다른 사람을 선잠단으로 보내 대신 행하게 하는 것과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선잠단을 쌓고 직접 제사하는 방법이 있었다. 조선시대 친잠례에 관해서는 영조대에 편찬된『친잠의궤』(親蠶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의궤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경복궁 후원 터에서 행한 친잠례를 정리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친잠례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친잠례를 행할 때 왕비는 황색 국의를 입었다. 왕비가 뽕을 딸 장소에는 채상단(採桑壇)이라는 단을 쌓았다. 흙으로 채상단을 쌓은 후 잔디를 심고 주변에 휘장을 쳐서 다른 곳과 구분하였으며,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머무를 천막을 쳤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뽕을 따고 누에를 치기 위해서는 광주리,갈고리,시렁,잠박(蠶箔),누에 등이 필요했다. 왕비 등이 딴 뽕을 담기 위한 도구인 광주리는 대나무를 쪼개서 엮어 만들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모양이며 색깔은 왕비의 국의와 같은 황색이었다. 지팡이 모양의 갈고리는 기다란 뽕나무 가지를 당기기 위한 도구로, 손으로 잡는 자루와 나뭇가지를 걸기 위한 갈고리로 구성되었다. 왕비가 사용하는 갈고리는 주석으로 만들었고 붉게 칠한 가래나무로 자루를 만들었다. 이에 비해 수행 여성들이 쓰는 갈고리는 숙동(熟銅:열처리한 구리)으로 만들었는데, 자루는 가시나무였으며 색을 칠하지 않음으로써 왕비의 갈고리와 구별하였다.
시렁은 잠판(蠶板)을 얹어 놓기 위한 구조물로, 둘 가 소나무로 만들었다. 누에를 키우는 깔자리는 잠박이라고 하는데, 대나무를 쪼개 발과 같은 모양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시렁 위에 잠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잠박을 둔 후 누에를 놓아 길렀다. 그리고 때에 맞춰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주었다. 친잠에 사용할 누에는 한성부에서 상등품을 거두어 준비한 것으로 채상단 옆에 친 천막에 두었다.
친잠례 때 왕비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왕세자빈을 비롯해 내외명부의 여성들이었다. 내명부는 1품이상, 외명부는 당상관 이상의 부인들이 선발되었다. 수행 여성들은 아청색 옷을 입어 국의를 착용한 왕비와 구별되었다.
친잠례 당일 왕비는 내전을 떠나 친잠할 장소로 행차하였다. 이때 친잠에 사용할 광주리, 갈고리 등의 도구도 같이 가지고 갔다. 왕비가 출궁할 때는 왕과 마찬가지로 왕비의 도장과 의장물과 악대가 딸렸다. 친잠할 장소에 도착한 왕비는 우선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린 후 채상단 옆의 천막으로 이동하여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왕비는 채상단의 남쪽 계단을 이용해 단으로 올라가 다섯 가지의 뽕나무에서 잎을 딴 후 황색 광주리에 넣었다. 이후에는 수행 여성들이 채상단 주위에서 뽕잎을 따기 시작했다. 왕비는 이 모습을 채상단의 남쪽에서 관람하였다. 왕비를 수행한 여성들이 따는 뽕나무 가지의 수는 품계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는데 1품 이상은 일곱가지, 그 이하는 아홉가지 였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딴 뽕잎을 누에가 있는 곳으로 가져가는데, 이때는 왕비 대신 왕세자빈이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갔다. 누에를 지키고 있던 잠모(蠶母:누에 치는 여성)는 이 뽕잎을 받아서 잘게 썰어 누에에게 뿌려 주었다. 누에가 뽕잎을 다 먹으면 왕세자빈이 다시 수행 여성들을 대동하고 왕비에게로 돌아왔다. 직접적인 친잠 행사는 여기까지였고, 이후에는 왕비가 왕세자빈 이하 모든 여성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를 위해 왕비와 수행 여성들은 다시 평상복에서 예복으로 갈아 입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왕비가 채상단에 오르면 수행 여성들은 왕비에게 절을 네 번 올렸고, 연회가 끝나면 왕비는 다시 의장물을 갖추어 내전으로 환궁하였다.
궁중에서는 왕이 왕비를 위해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대소 신료들은 친잠을 위해 고생한 왕비에게 글을 올려 축하와 감사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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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잠례
태종 11년(1411)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태종 18년(1418)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성종 6년(1475년 6월) 성종비 폐비윤씨
성종 8~9년년(1477~1478) 성종비 폐비윤씨
성종 24년(1493) 성종비 정현왕후 윤씨 (성종대왕 친경*국왕이 농사의 모범을 보이고 풍작을 기원하는 뜻에서 직접 행하던 농사짓는 의식)
성종 24년(1493) 3월 21일
왕비가 친잠하다
왕비(王妃)가 후원(後苑)의 채상단(採桑壇)에 나아가 왕세자빈(王世子殯)과 내외(內外)의 명부(命婦)를 거느리고 친잠(親蠶)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연산군 10년 (1504) 연산군비 거창군부인 신씨
연산 10년(1504) 3월 27일(무자)
왕비가 누에치는 의식을 거행하다
왕비가 명부(命婦)를 거느리고 친히 누에치는 의식[親蚕禮]을 거행하였다. 왕이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기를,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백성들이 힘입어 생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을 힘쓰는 자는 항상 적고, 끝을 따르는 장사는 항상 많으니, 진실로 인군이 몸으로 시범하여 백성을 의식의 근원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장차 권면할 바를 알지 못하여 본업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어질고 밝은 제왕들이 농상(農桑)을 급무로 하지 않는 이가 없어, 천자는 친히 밭갈아 천하의 농부를 권장하고, 황후는 친히 누에 쳐 천하의 여공(女工)을 솔선하였으니, 무일(無逸)의 전공(田功)4263) 과 빈풍(豳風)의 조상(條桑)4264) 은 이것이 주(周)나라 왕업(王業)을 일어나게 한 것이다.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매양 농상(農桑)이 왕도 정치의 급무임을 생각하여 모든 권장하는 방법을 일찍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연사가 잇따라 풍년들지 않아 백성이 기한(飢寒)에 허덕이므로, 남자에게는 남은 곡식이 없고, 여자에게는 남은 베가 없다. 말이 여기에 미치매 곧 마음이 아프다. 어찌 내가 몸으로 앞장서기를 잘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래서 홍치(弘治)4265) 17년4266) 3월 2일에 내가 공경 백집사(公卿百執事) 및 서인(庶人)을 거느리고 친히 동교(東郊)에서 밭갈이하여 오퇴(五推)의 의식을 하였으며, 지난 27일에는 왕비가 내외 명부(命婦)를 거느리고 친히 잠단(蚕壇)에 임하여 오조(五條)의 예(禮)에 맞추었다.
무릇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어찌 겉치레만 하여 아름다움을 한때에 자랑함이겠는가? 다행히도 우리 백성들이 보고 느끼며 일어나 근본에 종사하고 끝을 버리며 밭갈이와 누에 치기에 부지런하여 부유하고 번성해지는 효과를 거둔다면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몸소 밭갈고 친히 누에 쳐 너희들을 후생(厚生)하게 하는 정사를 닦았으니,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짜서 나의 근본을 힘쓰는 정성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중종 8년 (1513년 3월 36일) 장경왕후 윤씨
중종 8년(1513 ) 3월 26일
후원에서 친잠례를 행하다
중궁전(中宮殿)이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를 거느리고 후원에서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중종 13년 (1518년 1월) 문정왕후 윤씨
중종 24년(1529년3월24일) 문정왕후 윤씨
중종 24년(1529) 3월 27일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창덕궁 후원에서 친잠을 행하다
왕비(王妃)가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를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에서 친잠(親蠶)하였다.
명종 8년(1553년 3월) 인순왕후 심씨
명종 12년(1557년 8월)인순왕후 심씨
선조 5년(1572년 3월) 의인왕후 박씨
선조 5년(1572) 3월 1일
중전이 친잠하다
중전(中殿)이 친잠(親蠶)하였다.
광해군 7년(1615년 9월) 문성군부인 유씨
광해 7년(1615) 12월 9일
친잠 후 주연을 베풀 때 침향산 학무를 시행할 것을 전교하다
장악 도감이 아뢰기를,
“내년 봄 친잠(親蠶)한 후 위로하는 주연을 베풀 때에 시행한 〈기생의 여러 가지 정재(呈才)890) 단자(單子)를 낙점받은 것 안에, 침향산 학무(沈香山鶴舞)를 정재에 아울러 넣어서 마련하여 시행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위로 주연에서 정재는〉 여자 기생으로 행하는 것이 규례인데 침향산 학무는 남자의 무악입니다. 이 주연은 내정에서 설행할 터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소에 내정에서 처용무(處容舞)를 관람할 때에도 학무(鶴舞)가 있었으니 조사하여 이 예에 따라 살펴 행하라. 혹 여자 기생에게 가르쳐서 해도 될 듯 싶다.”
하였다.
광해군 12년(1620년 4월) 문성군부인 유씨
광해 12년(1620) 4월 20일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친잠례를 행하다
왕비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거느리고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숙종 3년(1677년 3월 10일) 인경왕후 김씨
숙종 3년(1677) 2월 27일
친경을 거행하려 할 때 비바람이 일어 온종일 그치지 않다
영조 43년(1767년 3월) 정순왕후 김씨
영조 43년(1767년 6월) 정순왕후 김씨
융희 3년(1909년 4월)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황제 친견
융희 3년(1909년 6월) 순정효황후 윤씨
융희 4년(1910년 6월 25일)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 3년(1910) 6월 25일
황후가 친잠실에서 누에고치를 따는 의식을 가지다
황후(皇后)가 친잠실(親蠶室)에서 수견식(收繭式)을 행하였다.
융희 7년(1914년 6월 11일)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 7년(1914) 6월 11일(양력)
왕비가 비원의 친잠실에서 수견식을 행하다
왕비(王妃)가 비원(祕苑) 친잠실(親蠶室)에서 수견식(收繭式)을 행하였다.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부인, 총무 국장(總務局長)인 백작(伯爵)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의 부인 및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의 부인 이하 종척(宗戚)과 귀족(貴族)이 함께 참석하였다. 식을 마치고 수정(水亭)에서 오찬(午餐)을 열었다
융희 16년(1923년 6월 20일)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 16년(1923) 6월 20일
왕비와 함께 잠실에 가서 수견식을 행하다
친잠실(親蠶室)에 나아갔다. 왕비도 함께 나아가 수견식(收繭式)을 행하였다. 그리고 주합루(宙合樓)로 나아가 다과(茶菓)를 베풀었다. 조선(朝鮮) 귀족(貴族) 및 귀족 부인(貴族夫人)이 함께 참석하였다.
융희 17년(1924년 6월 17일)순정효황후 윤씨
1924년 6월 17일 순종효황후의 친잠 모습.
1929년~1930년 순정효황후 윤씨
1933년 6월 26일 순정효황후 윤씨
조선시대의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는데, 왕비가 행하는 친잠례(親蠶禮)는 특히 여성 노동을 상징하였다.
남성들이 밭에 나가 땅을 갈고 먹을것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입을 것을 생산하였다.
길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다. 봄에 부지런히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그 실로 가을에 좋은 비단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 왕비가 내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蠶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이 바로 친잠례였다. 이 의식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3월에 친경례(親耕禮)와 함께 시행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잠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전국에 잠실을 두었는데, 한양에도 동잠실과 서잠실 등을 두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에 설치한 잠실을 내잠실(內蠶室)이라고 하였는데, 왕비는 주로 이곳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친잠례를 행하기 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선잠은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黃帝)의 부인 서릉(西陵)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서릉이 처음으로 양잠을 하였으므로 누에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선잠을 모신 곳이 선잠단(先蠶壇)인데, 조선 초기에 동소문(東小門:혜화문)밖에 있다가 후에 선농단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선잠단에 올리는 제사는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중사(中祀) 규모였다. 선잠단에 제사를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다른 사람을 선잠단으로 보내 대신 행하게 하는 것과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선잠단을 쌓고 직접 제사하는 방법이 있었다.
조선시대 친잠례에 관해서는 영조대에 편찬된『친잠의궤』(親蠶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의궤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경복궁 후원 터에서 행한 친잠례를 정리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친잠례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친잠례를 행할 때 왕비는 황색 국의를 입었다.
왕비가 뽕을 딸 장소에는 채상단(採桑壇)이라는 단을 쌓았다. 흙으로 채상단을 쌓은 후 잔디를 심고 주변에 휘장을 쳐서 다른 곳과 구분하였으며,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머무를 천막을 쳤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뽕을 따고 누에를 치기 위해서는 광주리,갈고리,시렁,잠박(蠶箔),누에 등이 필요했다. 왕비 등이 딴 뽕을 담기 위한 도구인 광주리는 대나무를 쪼개서 엮어 만들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모양이며 색깔은 왕비의 국의와 같은 황색이었다. 지팡이 모양의 갈고리는 기다란 뽕나무 가지를 당기기 위한 도구로, 손으로 잡는 자루와 나뭇가지를 걸기 위한 갈고리로 구성되었다.
왕비가 사용하는 갈고리는 주석으로 만들었고 붉게 칠한 가래나무로 자루를 만들었다. 이에 비해 수행 여성들이 쓰는 갈고리는 숙동(熟銅:열처리한 구리)으로 만들었는데, 자루는 가시나무였으며 색을 칠하지 않음으로써 왕비의 갈고리와 구별하였다. 시렁은 잠판(蠶板)을 얹어 놓기 위한 구조물로, 둘 가 소나무로 만들었다.
누에를 키우는 깔자리는 잠박이라고 하는데, 대나무를 쪼개 발과 같은 모양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시렁 위에 잠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잠박을 둔 후 누에를 놓아 길렀다. 그리고 때에 맞춰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주었다. 친잠에 사용할 누에는 한성부에서 상등품을 거두어 준비한 것으로 채상단 옆에 친 천막에 두었다. 친잠례 때 왕비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왕세자빈을 비롯해 내외명부의 여성들이었다. 내명부는 1품이상, 외명부는 당상관 이상의 부인들이 선발되었다.
수행 여성들은 아청색 옷을 입어 국의를 착용한 왕비와 구별되었다. 친잠례 당일 왕비는 내전을 떠나 친잠할 장소로 행차하였다. 이때 친잠에 사용할 광주리, 갈고리 등의 도구도 같이 가지고 갔다.
왕비가 출궁할 때는 왕과 마찬가지로 왕비의 도장과 의장물과 악대가 딸렸다. 친잠할 장소에 도착한 왕비는 우선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린 후 채상단 옆의 천막으로 이동하여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왕비는 채상단의 남쪽 계단을 이용해 단으로 올라가 다섯 가지의 뽕나무에서 잎을 딴 후 황색 광주리에 넣었다. 이후에는 수행 여성들이 채상단 주위에서 뽕잎을 따기 시작했다. 왕비는 이 모습을 채상단의 남쪽에서 관람하였다.
왕비를 수행한 여성들이 따는 뽕나무 가지의 수는 품계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는데 1품 이상은 일곱가지, 그 이하는 아홉가지 였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딴 뽕잎을 누에가 있는 곳으로 가져가는데, 이때는 왕비 대신 왕세자빈이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갔다. 누에를 지키고 있던 잠모(蠶母:누에 치는 여성)는 이 뽕잎을 받아서 잘게 썰어 누에에게 뿌려 주었다.
누에가 뽕잎을 다 먹으면 왕세자빈이 다시 수행 여성들을 대동하고 왕비에게로 돌아왔다. 직접적인 친잠 행사는 여기까지였고, 이후에는 왕비가 왕세자빈 이하 모든 여성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를 위해 왕비와 수행 여성들은 다시 평상복에서 예복으로 갈아 입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왕비가 채상단에 오르면 수행 여성들은 왕비에게 절을 네 번 올렸고, 연회가 끝나면 왕비는 다시 의장물을 갖추어 내전으로 환궁하였다. 궁중에서는 왕이 왕비를 위해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대소 신료들은 친잠을 위해 고생한 왕비에게 글을 올려 축하와 감사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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