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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10, 2012

people along Cheonggyecheon river 청계천 in 1970' by Seongnam lighthouse keeper

Cheonggyecheon river 청계천 in 1970


청계천 관련 글들

■ 청계천의 옛 다리들

■ 청계천의 개발역사





조선후기의 청계천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유흥가로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왈자(曰子) 들이었다. 왈자란 기술직 중인, 경아전(京衙前, 각사 서리, 대가의 겸종), 액예(掖隸, 대전별감, 무예별감), 군교(軍校, 포교 등 하급군인), 시전상인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상업이 번창한 서울 도심 부에서 술집과 기방을 주름잡던 중간계층이었다. 그리고 기방에서 이들을 상대하는 기생 또한 청계천에서 활동 하고 있는 주요 구성원이었다.




왈자들은 직역에 따라 각각 거주지역을 달리하였다. 상류에서부터 지역별로 거주 하고 있는 청계천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선 광통교를 중심으로 상류 '우대'에는 각 관아에 소속된 서리 등 경아전들이 거주하였으며, 장통교, 수표교 어름의 중촌에는 중인들이, 효경교 아래 아래대에는 군교(軍校)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우대, 즉 상촌(上村)에 살고 있는 경아전의 대표적인 부류는 서리(胥吏)들이었다. 이들은 육조, 한성부, 비변사, 선혜청, 내수사 등 관아에 소속되어 문서의 처리, 등사(謄寫), 업무연락을 맡거나, 고급관리나 종친의 심부름을 하였다.



이들은 해당 관아의 실무담당자로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실용서를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시문(詩文)을 익혀 양반사대부 계층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직임(職任)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한편으로는 협객(俠客)이 되어 시전 상인들과 함께, 술집과 기방, 도박장 등 유흥가를 휩쓸고 다녔다.



광통교 부근의 다동, 상사동은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시전의 상인들이 살았다. 오늘날 청계천이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청계천 주변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청계천 주변에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거리 쪽으로는 점포를 내고, 그 뒤쪽에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상인들 또한 조선후기 상권의 독점, 중국·왜와의 중개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권세 있는 양반들과 어울리며,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서린동과 다동(茶洞) 일대와 상사동(想思洞, 지금의 청진동과 종로 1가 사이) 일대에 특히 많이 거주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신분상으로도 다른 지방의 상인들과는 달리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원래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조선시대의 신분체계로 볼 때 상인은 가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시정상인만은 경아전과 같은 중인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제 상업적인 부를 기반으로 경아전이 되기도 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 물품의 거래가 활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청계천 지역은 자연 도성내의 대표적인 유흥가가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서울은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소비적 유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주사(酒肆, 술집)와 기방(妓房)이 번창하고 도박 따위가 성행했던 것이다.




길거리 곳곳에는 주막 깃발이 펄럭이고, 술과 매음을 영업종목으로 하는 색주가(色酒家)가 성업 중이었다. 속칭 '군칠(君七)이집'이라 불리는 한 술집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주등(酒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다동, 상사동 지역은 지금의 청진동과 서린동(남)이 기방촌(妓房村)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색주가(色酒家)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비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심 그룹은 당연히 기녀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문직업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노비와 같은 천인이었으나 이들이 상대하는 남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에서부터 하급관리, 시전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였다. 기녀들은 남자들을 접대하는 직업의 성격상 아름다운 용모는 물론, 가무와 시문에도 능하였다.



장통교, 수표교 어름은 중촌(中村)이라고 하여 중인(中人)들이 거주하였다.

조선시대 중인이란 경아전(京衙前)·역관(譯官)·의관(醫官)·천문학관(天文學官)·화원(畵員)·사자관(寫字官) 등 기술직 관료들로 요즈음으로 말하면 외교관, 의사, 천문학자, 화가 등 전문직업인이었다.




중인들 중에서도 청계천 주변 중촌에는 특히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이 많이 살고 있었다. 역관은 승문원(承文院)이나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되어 중국, 왜, 여진 등과의 외교에서 외교문서의 작성, 통역을 담당하는 실무담당자로서 외교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역관들은 중국 사행을 통하여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따라서 역관출신 중에는 거부가 많았다. 한 예로 조선 숙종 때 역관 변승업(卞承業)의 경우 역관 무역을 통해서 축척한 부를 바탕으로 고리대금업을 했는데, 대출총액이 50여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 변승업은 다방골(茶房洞)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는 한때 '다방골 변부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관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에 소속되어 병자의 치료와 의약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특히 내의원 이나 전의감에 소속되어 임금을 비롯한 왕족, 고급관료를 치료하는 의관의 경우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의관들은 의료서비스와 도성 내 약재 판매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편이었다.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銅峴)에는 약재를 판매하는 약종상이 밀집해 있었다.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약재는 반드시 구리개에서 매매되었는데, 이 일대의 약재의 독점적 판매권을 가진 것이 바로 의관들이었다.



관이나 의관들 중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은 물론 학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양반과 직접 교유하기도 하였으며, 근대화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역관 오경석(吳慶錫)과 의원 유홍기(劉鴻基, 大致)가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김옥균, 유길준 등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불러 서구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등 개화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효경교(지금의 청계 4가 아세아전자상가, 구 아세아 극장) 아래 도성 동남쪽과 왕십리 일대는 '아래대', '하촌(下村)' 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에는 군교(軍校)라고 하는 하급 군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곳에는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 치안과 수도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군영(軍營)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이곳에 속된 직업군인들로 아래대에 하급군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것 역시 주변의 지리적인 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하급 군인들은 직업군인으로 일정한 급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만성적인 재정부족 으로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상업과 수공업을 허락하였는데, 군인들은 이곳에서 채소를 재배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근교농업으로서 자가 소비의 목적이 아닌 도성 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채소를 판매하기 위한 상업적 영농이었다.



훈련원 근처는 배추의 지배지로 유명하여 여기서 나는 배추는 '훈련원 배추'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또한 성밖의 왕십리는 무와 미나리의 재배지로 유명하여 '왕십리 미나리장수'란 말도 생겨났다.



하급군인들의 수공업 역시 활발하였는데, 특히 훈련도감 소속 공장의 일부는 근무 이외의 시간에 각종 수공업제품을 제작 판매하여 수공업과 상업으로 진출하였다.



청계천 사람들은 상류 양반사대부 계층이 아닌 시전상인, 역관, 의관과 같은 기술직 관료, 하급군인과 기생, 거지와 같은 조선시대 신분구조상 기층을 이루는 중하층 사람들로서, 이들은 청계천뿐만 아니라 서울의 기층문화 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이었다.





기사제공 : 서울시청











(대한제국시기) 천변 호안석축은 잘 쌓여져 있고 군데군데 풀이 무성하다.

석축 위 천변길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있는데, 양반 여인네들이 장옷을 입고

얼굴만 내놓은 채 걷고 있다. 청계천 남쪽을 촬영한 듯 길가 벽에는 창이 보이지 않는다.








(1900년경, ⓒ고종호 '京城名所' 사진엽서) 종로방향에서 광통교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광통교는 남대문로와 종로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남대문에서 종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곳은 시전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도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였다. 사진 중앙에는 광통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난간석이 잘 보인다.








빨래터 (1904년, ⓒ서희경)

청계천 상류는 물이 얕고 맑아 빨래를 하려는 주변의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지게꾼 (대한제국시기, ⓒ서문당)

청계천을 따라 나있는 길이 좁은 듯 개천을 보호하기 위한 축대 밑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 곰방대를 쥐고 있는 중년 남성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지게에 무언가를

담고 가는 지게꾼이 보인다. 수표교 부근은 서울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날품팔이 지게꾼들이

일이 걸릴까 하고 모여들곤 하였다. 당시 시골살림이 어려워 서울로 이사 온 사람들은

남정네는 지게꾼으로 아낙네는 행상으로 나서기가 십상이었다.





수표와 수표교






(일제강점기, ⓒ국사편찬위원회) 수표교 남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수표교 남편에는 양 길가에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좌측 길모퉁이에 담배를 팔았던

연초煙草(タバコ)가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양옆에 약국과 중앙상회지점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탕반, 탁주, 소주 등을 한자와 한글로 쓴 술집 간판이 보인다.








(1950년대말~1960년대초, ⓒ기성철) 어느 한가한 날 수표교를 찍은 사진이다.

수표교 난간 위에는 한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데, 사진소장자 본인이라고 한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담뱃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수표교에는 난간석 1조가 없는데, 소장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상처라고 한다.





천계천 주변천








(대한제국시기, 삼청동천, ⓒ김종영(朝鮮風俗-井戶ト水汲夫사진엽서))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1927년, 금청교, ⓒ고종호)

금청교는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판자촌

광복과 한국전쟁 후 서울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청계천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잣집은 불결과 빈곤의 상징이었다.

큰 비가 쏟아지면 집을 떠받치고 있던 나무기둥이 불어난 하천에 쓸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집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 거주민들이 버린 생활하수가 그대로 하천으로 배출되어

청계천은 심한 악취가 진동하고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염색공장 (1960년대말, ⓒ원종철)


한 아저씨가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 위에 널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그나마 미군부대 등 군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물자만이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군복을 염색해서 많이 입었다.
당시 청계천변에는 군복을 염색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출된 하수는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 때문에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나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고 한다.















복개 전 풍경 (1965년, ⓒ국가기록원)


오간수문 밖 하류 청계 6가 청계천변의 당시 일상 풍경이다.
열 지어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에서 뛰놀며 물놀이 하던

아이들은 지친 듯 늘어놓은 콘크리트 파일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아이들은 과연 곧 닥쳐올 청계천 판자촌의 운명, 청계천이 복개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청계천 복개공사 (1964.5.29) 대한민국 기록사진집









평화시장 (1965년, ⓒ국가기록원)


평화시장은 청계천이 오간수문까지 복개되면서 함께 문을 열었다.
시장 이름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피난민들이 세웠기 때문에

평화를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시장은 1960년대 한국 수출산업의 선구적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그러나 또한 당시 노동자들의 한숨과 분노가 스며 있었으니

1970년 겨울,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곳도 이 시장 앞이었다.









가두노점 (1965년, 서울특별시)

복개된 후 청계천로를 찍은 사진으로 중앙에 보이는 가두노점이 인상적이다.
요즘 길가에 보이는 가판대와는 많이 다르지만 크기나 기본적인 모습은 거의 흡사해 보인다.
한편 이곳이 건널목인 듯, 한 사람이 차도로 내딛고 있다.









최신 건축물 세운상가 (1968년, ⓒ서울특별시)


세운상가는 건축가 김수근씨가 최신 건축사조를 끌어들여 만든 최첨단 건물이었다.
설계방식은 60년대 이후 서울이 개발되는 과정을 그대로 상징하는데, 1~4층은 상가로 하되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설정하고 대신 3층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건설하는 등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주상복합타운이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획기적인 설계방식이었다.

이 세운상가는 국내 전자산업이 태동할 당시 전자부품이 집결되는 곳으로

70~80년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출처 : B급호러 Movie










1970년대 청계천변 판자촌 주민들의 생활모습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노무라 모토유키씨(野村基之, 1931년생, 日本 山梨縣 거주)씨.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인 그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동대문구 답십리등 청계천 하류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찬샘님의 블로그)






간절한 기도





답십리 판자촌






비닐 움막집






송정동 전농 배수펌프장

(철거전)






송정동 제방






기도





살곶이다리부근에서 만난소녀






웃고있는 동심






판자촌











우물가의 모녀






이발소가 있는 판자촌 풍경






재활용 우산 만들기






철교아래 토굴






청계천 하류 송정동 판자촌






청계천 활빈교회






쳔변의 아이들






판자촌






판자촌






판자촌






판자촌 골목 풍경








판자촌 길가 풍경






판잣집 벽지 만들기
















한양대 부근 판자촌 전경






한양대 살곶이다리 부근






한양대 살곶이다리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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