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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29, 2011

the hat of kisaeng Korean traditional hat-maehwa junmo 기생 모자

http://www.sonjjang-hanbok.com/korean-traditional-accessories/hair-accessory/korean-traditional-hat-maehwa-junmo1-hat-of-kisaeng.html



Hwang Jin Yi, the drama is very interested in studying Korean hetaera Kisaeng.


Hwang Jin Yi ost - The dance of the sword  剣の舞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821401002

《삶과꿈》에서는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신현규 교수의 도움으로 <기생 푸르디푸른 꿈을 꾸다>란 제목 하에 우리나라의 기생들의 삶과 꿈을 재조명해 보는 새로운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EBS-TV 평생대학 ‘신현규의 조선 기생이야기’(3부작) 특강, LG 생활건강 ‘조선트랜드세터 기생이야기’ 특강, 중앙공무원연수원 ‘조선 기생이야기’ 특강 등 기생에 대한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많은 강의를 해오신 신현규 교수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기생이야기. 《삶과꿈》 기생이야기 연재는 8월을 맞아 항일독립운동의 꽃, 기생 현계옥의 ‘삶과 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 편집자 註


‘말을 타는 기생’이 ‘항일무장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신문지상에서 ‘말을 타는 기생’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가 바로 현계옥(玄桂玉, 1897∼?)이다. 우리나라 근대 승마의 역사에서 기생 출신의 여성들은 ‘여성 최초’의 서구식 승마를 했다는 타이틀을 얻었다.

계옥은 경상북도 달성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그녀의 용모는 풍만했고, 재주는 민첩했다. 경박하지 않고, 풍류가무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가곡, 정재무, 승무, 그리고 절묘한 가야금 연주도 그녀의 일부와 같았다. 그녀가 하는 소리와 산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춤과 가야금에는 대적할 이가 없다하여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당대의 명기였다. 남보다 재주가 많으면 남보다 정조도 더 굳은 걸까.

그런 콧대 높은 계옥이 현정건(玄鼎健, 1887∼1932)이라는 남성을 만나 뜨거운 연애사건을 벌이게 된다. 현정건은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사촌 형으로 일찍이 일본·중국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유학한 인텔리이다. 그가 때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친구와 어울려서 기생집을 한 번씩 찾곤 했는데, 이후 계옥에게 운명의 남자가 된다. 그녀의 나이 19세, 시국에 불만을 품고 중국, 일본으로 돌아다니던 그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계옥은 거처를 경성의 한남권번으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정건의 집안에서는 기생과 친하게 지내면 못 쓴다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엄중히 감시하기에 이른다. 계옥의 집안에서도 돈이 없는 그를 가까이 할 필요가 있느냐며 그녀를 닦달하였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젊은 남녀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계옥은 자신의 기생생활을 저주하며 박명을 한탄하던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리어 밤잠을 못 이루고 신음하는 몸이 되고 만다.

몽매에 그리워하던 정건이 얼마 되지 아니하여 중국 상해로 들어가고, 한 이탈리아 신문의 기자로 있게 되자

“날 데려 가오.”

“잠깐만 더 기다리오.”

하는 편지가 황해 바다를 덮을 만큼 끊임없이 오고갔다.

그런데 계옥의 손님 중에 전(田)씨 성을 가진 한 청년은 같이 한 번 살아보면 여한이 없겠노라고 애원하기까지 하였다. 계옥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실망한 청년은 현정건을 빗대어 ‘현(玄)’씨끼리 살면 ‘자(玆)’씨가 된다고 비꼰다. 구변 좋은 계옥은 ‘현(玄)’씨와 ‘전(田)’씨가 같이 살면 ‘축(畜)’씨가 된다고 대응한다. 절묘한 거절이다. 똑똑한 계옥의 재치가 돋보이는 이 일화는 유명하다.




애국투쟁을 위해 만주로 떠나다

계옥은 현정건의 소식을 듣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독립 청년들과 자주 사귀게 된다. 그 덕분에 중국 신해혁명에 유명한 손문(孫文)과 함께 한 혁명가 황흥(黃興, 1874~1916)의 사적도 전해 듣는다. 당시 중국의 기녀들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는 긴급한 상황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애국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녀들은 ‘청루(靑樓)구국단’을 조직하여 “직업은 비록 천하지만 애국하는 것은 한 가지다”라는 성명을 낸다. 적지 않은 연예인과 가녀(歌女)들도 애국투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연극과 노래를 중지한다. 또한 중국 천진(天津)의 기루(妓樓)에서 기녀 정추진이 ‘여자 혁명결사대’를 통하여 이름을 일세에 떨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자신의 새로운 앞길을 결정하고 마침내 험난한 만주 벌판으로 떠날 결심을 굳힌다.

이제 계옥은 정건의 애인이자 동지가 되었다. 경찰들이 기생집에 감시가 허술한 점을 틈타 모임을 주선하고 여러 핑계로 요릿집 놀음에도 나가지 않았다. 노래는 물론이요 일흔 두 가지 춤을 출 줄 알고, 한문 글씨 잘 쓰기로도 당대의 기생 중 대적이 없었다는, 특히 말 잘 타기로 이 유명한 기생. 아무리 애를 쓰고 마음을 태워도 그녀를 볼 수 없었던 풍류객들은 애가 탈대로 타서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황금정 승마구락부에서 남자처럼 승마복을 입고 말 타는 그녀를 찾아다니는 풍류객까지 생길 정도였다. 당시 계옥이 승마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자신의 키보다 높은 말 위에 앉아 화살같이 달리는 늠름한 모습을 한번쯤 상상해보면 어떤 남성이라도 미혹할 만하지 않을까.

드디어 21살이 되던 해 봄, 1919년 2월에 계옥은 몰래 가산을 정리하여 길 떠날 준비를 마친다. 그런데 같이 가려던 정건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고 만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가 석방되던 때는, 남녀노소 할것없이 모두 만세들을 부르고 투옥되던 처절한 3월 중순경이었다. 계옥은 밤을 새워 잡히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한다. 정건과 중국에서 만날 약속을 한 후, 그가 소개해 준 청년의 뒤를 따라나선다. 계옥은 중국옷으로 변장하고 귀를 뚫어 중국 여자 모양으로 고리를 걸어서 교묘히 피하기도 하였다.

중국 안도현에서 이틀 밤을 자고 봉천에 이르러 ‘황사후루(皇寺後褸)’란 곳에서 보름 동안 머물렀다. 하지만 일본 관헌의 감시는 여전히 심하고 계옥을 알지 못하는 청년들은 그녀의 행색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러저러한 상황에 몰려 계옥은 ‘북릉어화원(北陵御花園)’이란 곳으로 옮겨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정건은 계옥이 뛰어난 용모로 해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믿을 만한 친구에게 부탁하여 먼저 떠나보낸 터였다. 정작 자신은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기 위해서 늦게 길림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때 봉천에 있는 계옥에게 오라고 통지를 하면서 동시에 첫 활동을 준비하게 된다.

길림, 그곳에는 1918년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간 김원봉,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이미 와 있었다. ‘의열단’, ‘광복단’을 조직하고 각종 기관을 만들어 내외의 연락을 도모하고 동지를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등 무장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정건의 부름을 받고 길림에 다다른다. 그리고 《비전(秘傳) 혁명전기》 중에서나 보던 인물들과 비로소 만난다. 지금까지 사귀어 오던 뭇 사나이들과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정성껏 그들의 일을 돕는 한편, 정건과 단란한 가정을 이룰 꿈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 많고 시기 많은 세상은 그녀의 알뜰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꿈에도 없던 소리를 지어내기만 한다. 무성한 소문으로 그녀의 집까지 습격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계옥은 더 마음을 다잡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의 결심을 드러낸다.

유일한 여성 의혈단원이 되다

계옥은 독립운동 청년들의 고달픈 심경을 위로하고자 송화강변에서 달빛을 담아 가야금을 연주한다. 그 달빛의 선율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면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보듬어 주었다. 차차 계옥의 정성을 알게 되자, 의열단장 김원봉의 인정을 받아 여성으로 유일한 ‘의열단원’으로 인정해 주게 된다.

그 후 계옥은 정건에게 영어를, 김원봉으로부터는 폭탄제조법과 육혈포 쏘는 방법을 배워 조직의 비밀활동을 담당하였다. 얼른 보기에 여자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신을 감행하곤 했다. 그녀는 때때로 교묘한 꾀로 의열단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한번은 중국 천진에 있는 폭탄을 상해로 운반해야 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관헌의 감시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조해지던 차였다. 계옥은 양복을 입고 폭탄을 가지고는 단신으로 배를 타고 상해로 돌아간다. 관헌의 취조가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사람 옆으로 가서 공연한 말을 걸어서 남 보기에 부부가 여행하는 것처럼 꾸며 무사히 운반에 성공하였다. 풍속이 다르고 말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계옥과 그 일행들이 조석으로 변장을 하며 신출귀몰하였을 것을 상상해 보면 박진감 넘치는 활극을 방불케 할 것이다.

그 후 계옥은 정건과 같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있으면서 동생 계향(桂香)과 월향(月香)을 조선으로 보낸다. 계향은 사회주의 운동가 박일병(朴一秉, 1893~?)과 같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었고, 월향은 독립운동가 신백우(申伯雨, 1887~1959)를 도와주게 된다. 상해에서는 현정건과 윤자영(尹滋瑛, 1894~?)과 더불어 여전히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사이사이 꾸준히 영어공부를 계속한 덕분에 이제는 웬만한 영문소설까지도 넉넉히 볼 정도의 실력자였다.

30세가 되던 해, 정건이 1928년에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출옥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계옥은 시베리아로 망명한다. 이제 당대에 대표적인 행동파 ‘사상기생(思想妓生)’이 된 것이다. 현정건에게는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한편 그 못지않게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현계옥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버려진 묘비처럼, 망명 후에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글·사진제공_ 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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