欧米から見た朝鮮-画像倉庫
Paul Georg von Möllendorff : ein deutscher Reformer in Korea
Eun-Jeung Lee
(OAG Taschenbuch, Nr. 90)
Deutsche Gesellschaft für Natur- und Völkerkunde Ostasiens, c2008
West Goes East: Paul Georg Von Möllendorff and Great Power Imperialism in Late Yi Korea (review)
フォン・メレンドルフ『P・G・フォン・メレンドルフ伝』
묄렌도르프 지음, 신복룡・김운경 역주, 묄렌도르프自傳(外), 집문당, 1999.
Mellendorff wearing in Couture
洋装のメレンドルフ
Möllendorff in official Korean dress,Hanbok
韓服のメレンドルフ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7 February 1847 in Zehdenick, Prussia – 20 April 1901 in Ningbo, China) was a German linguist and diplomat. Möllendorff is mostly known for his service as an adviser to the Korean king Gojong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and for his contributions to Sinology. Möllendorff is also famous for having created a system for romanizing the Manchu language.
Möllendorff in official Korean dress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 조복을 입고 관대를 두른 묄렌도르프, 그가 조선옷을 입은 까닭은 백성들이 그를 유럽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려 한 고종의 요구 때문이었다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독일어: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2월 17일 ~ 1901년 4월 20일) 혹은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은 독일출신 외교 고문이다.
한국 조복을 입고 관대를 두른 묄렌도르프, 그가 조선옷을 입은 까닭은 백성들이 그를 유럽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려 한 고종의 요구 때문이었다
Mellendorff goes out on cat car
猫車で外出するメレンドルフ
William Richard Carles, 1846~1929
the Journal of the scenery Korea
W・R・カールズ『朝鮮風物誌』W. R. 칼스 지음, 신복룡 옮김, 조선풍물지, 집문당, 1999.
Official,Yangban goes out
高官の外出 (1)
Official,Yangban goes out
高官の外出 (2)
Selling eggs
鶏卵売り
Landscape in the streets
街角の風景
Kitchen
台所
Highwayman
追いはぎ
KIsaeng,Gisaeng
妓生
George William Gilmore, 1857~?)
G・W・ギルモア『ソウル風物誌』
G. W. 길모어 지음, 신복룡 역주, 서울풍물지, 집문당, 1999.
Korean teacher and his wife
ギルモアの朝鮮語教師とその妻
Wall in Seoul
ソウルの城壁
The girls came back from the laundry
洗濯場から戻って来た少女たち
Kisaeng
妓生
Kisaeng
妓生
Seodaemun
西大門
the gate for welcome China envoy
迎恩門
W・F・サンズ『極東回想記』
W. F. 샌즈 지음, 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집문당, 1999.
Wiliam Franklin Sands, 1874~1946
日露戦争の勃発とともに朝鮮を去るロシア公使パブロフ (A. I. Pavlow) の一行、左側一番後ろがサンズ
アンガス・ハミルトン『朝鮮』
Angus Hamilton, Korea,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04.
NATIVE DRESS
SHE MAY VISIT HER FRIENDS
E・ワグナー『朝鮮の子どもたち』
E. 와그너 지음, 신복룡 역주, 한국의 아동 생활, 집문당, 1999.
Family in garden
Mother and children
母親と子どもたち
Seesaw
シーソー
private school
書堂
Children's playing
子どもたちの遊び
Children wearing winter clothes
冬服の子どもたち
『申福龍教授の異邦人が見た朝鮮読み直し』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풀빛, 2002.
Namdaemun market
南大門市場
Selling candy
飴売り
Street vendors in Seoul
ソウルの露天商
イザベラ・バード御一行様
1895年の鍾路
1900年の鍾路。市電は1899年に米国資本によって開通した。
一升瓶を頭に載せて運ぶ女性
H・B・ドレイク『日本統治下の朝鮮』
H. B. Drake, Korea of the Japanese, John Lane the Bodley Head Ltd, 1930.
http://www.koreanerberlin.de/g4/bbs/board.php?bo_table=cm_old&wr_id=6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 조선 조정의 첫 서양인 고문
글쓴이 : korea 날짜 : 06-09-21 10:32 조회 : 2665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보다 상세한 연구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조만간에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첫 번째 한독간 조약이 체결되는데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독일편에서가 아니라 한국편에서 조약 체결에 관여했었다. 왜냐하면 그는 1882년말부터 1885년말까지 당시 조선 조정에서 첫 서양인 고문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제국의 인물이 중국측의 천거로 조선의 관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제국주의 시대가 극동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상을 보여 준 유일한 사례였다. 그는 한국 이름으로는 목인덕이라는 불리웠으며, 조선 관리의 복장을 착용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독립에도 헌신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폰 묄렌도르프는 1847년 2월 17일 우크마르크의 체데니크에서 태어났으며, 잘레 강변에 있는 할레에서 법학과 동양언어를 공부했다. 그는 22세에 중국의 세관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1850년대 중반부터 이 세관업무는 유럽인들이 담당해 왔었다.
그는 텐친에 머물면서 지방관이었던 리홍장을 알게 되는데, 리홍장은 당시 북부 항구들의 교역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었고 중국의 대외관계를 담당했었다. 조선이 리홍장에게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적인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요청했을 때, 리홍장은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를 적절한 인물로 천거했다. 리홍장은 이 독일인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를 희망했는데, 당시 청나라는 1882년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조정에서 외교협상과 관련한 자문과 세관업무 관련 지원을 맡았다.
묄렌도르프가 1882년 말을 타고 서울에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외국인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었다. 그는 1882년 12월 26일 고종황제를 알현했으며, 조선에 신설된 외교부서에 바로 그 날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참판직함을 갖고 세수와 항구관리 부서를 이끌었다. 이제 그는 조선의 관복을 입었으며 목참판이라고 불리웠다.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모든 중요한 외교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이미 그는 1883년 일년 전에 체결된 "조미 통상조약„의 문서를 교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조선이 독일제국,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과 통상.우호조약 등을 체결하는데 조선의 입장에 서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폰 묄렌도르프는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청나라측의 추천으로 조선에 들어왔으며, 일본을 견제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조선에 가하고 있는 위협들을 더욱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그는 긴급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 청나라가 형제국인 조선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러시아가 유일한 대안 세력이라고 판단하고 이러한 입장을 실제의 정책에 반영했다. 이는 결국 폭풍과 같은 격분을 불러 일으켰고, 청나라측에서도 그의 해고를 요구했다. 그는 조선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청나라의 의지를 과소 평가했던 것이다. 그는 1885년 7월 27일 자신의 직책에서 물러났으며, 1885년 12월 중국으로 돌아갔다.
폰 묄렌도르프는 일생 동안 조선에 관리로 다시 활동할 것으로 소망했었으나, 이러한 그의 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는 청나라의 세관업무에 다시 종사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1901년 4월 20일 닝포에서 세상을 떠났다.
http://mirror.enha.kr/wiki/%EB%AC%84%EB%A0%8C%EB%8F%84%EB%A5%B4%ED%94%84
[1]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2월 17일 ~ 1901년 4월 20일
조선에 공식으로 입국하여 외국적으로 관직을 얻은 최초의 서양인.
개화 초기 조선 최고의 실권자.
조선으로 오기까지 ¶
묄렌도르프는 체데닉(Zedenik) 지방의 귀족 후예로 태어나 할레 대학에서 언어학과 동양학을 전공하였다. 일찍이 외교관이 되고자 하여 1869년 현지 경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에 임용되겠다는 꿈을 품고 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청에서 해관에 취직하여, 5년간 지방 파견근무를 돌아다녔다. 그 동안 중국어를 익혔다.
당시 청국 해관은 로버트 하트가 세운 소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청국 해관의 수장, the Great I.G. 하트는 해관 내 전권을 휘두르고 무려 50년간 해관장의 자리는 지켰으며, 부하 직원들 위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때문에 묄렌도르프가 말단을 떠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874년 주 베이징 독일 영사관 통역관이 휴가를 떠나자 이 자리를 노리고 해관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통역관은 휴가를 떠나지 않았고, 묄렌도르프는 별정직원으로 채용되어 땜빵 통역관으로 또 파견근무를 다니게 된다. 당시 독일은 외교관을 본국에서 파견하였기 때문에, 현지 채용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묄렌도르프에도 기회가 왔으니 1879년 묄렌도르프는 톈진의 독일 영사관 영사 대리로 전근명령을 받는다. 당시 톈진은 북양 아문의 본거지로 청국 최고의 실권자 북양 대신 이홍장이 있는 곳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이홍장과 친분을 쌓게 되고, 이홍장도 묄렌도르프를 친우라 부르며 신뢰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독일 본국에서는 톈진 정식 영사를 파견, 묄렌도르프는 또 다시 통역관으로 좌천되었다(1881). 이에 묄렌도르프는 사표를 던지고 이홍장의 밑으로 들어갔지만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2]
1881년 당시 조선은 해관을 설립하고자 하고 청국에 청국인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청국인보다 서양인이 나을 것이라 하여 서양인 고문 고용을 권고하였다. 물론 개항[3]도 하지 않고 있던 조선이 이를 받아 들일 리가 없었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북양 아문은 새로 들어온 서양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준비시켰다. 조선이 서양인 파견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그 한달 후인 1882년 8월의 일이었다.
조선으로 ¶
묄렌도르프는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해관 설립을 위해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1882년 12월, 사표가 수리되고 묄렌도르프는 인천에 상륙하였다. 묄렌도르프를 맞이하기 위해 현직 병조판서가 톈진으로 갔을 정도이니 조선이 묄렌도르프에 건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일도 일이었으나 이홍장의 부하로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유지하는 임무 또한 띠고 있었다. [4]
묄렌도르프는 고종 면담후 각종 특권을 부여받고 통리아문 참의[5], 조선 해관 총세무사[6]에 임명되고, 목인덕(穆麟德)이란 이름을 썼다. 협판은 곧 참판급이었기에 조선에서 묄렌도르프는 목 참판으로 통했다. 이후 3년간의 조선 생활에서 많은 일을 하는데,
교섭통상사무아문 참판 목인덕 ¶
묄렌도르프는 새로 부임한 미국 영사를 맞이하고, 영국, 독일과의 재협상[7] 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고 프랑스, 오스트리아와도 조약 체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묄렌도르프는 본인 커리어에 치명타가 될 조약을 준비하였다. 인로책[8]의 시행자가 되어, 갑신정변 일로 일본에 사과차 가는 길에 러시아와 밀약을 맺는다. 이것이 제 1차 조러밀약이다. 이 밀약의 결과로 조선은 러시아에 영흥만(곧 원산)을 조차하고, 러시아는 조선에 장교와 부사관을 파견해 조선군 육성을 돕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에 영국이 강하게 반발하여 거문도[9] 사건을 일으키고, 이홍장도 격분하였으며 일본도 반발하였다. 결국 이 조약으로 묄렌도르프는 청국에 소환당하게 된다.
조선 해관 총세무사 목인덕 ¶
묄렌도르프는 청국 해관을 본따 조선 해관을 만들었다. 상하이에서 서양인들을 끌어 모으고 [10] 제물포, 인천, 원산에 해관을 설립해 조선 해관의 기틀을 갖추었다. 해관장으로서 묄렌도르프의 롤 모델은 하트였으며, 그를 본따 영문 직위도 I.G.(Inspector General)로 칭하였다. 물론 하트는 청국 속방의 해관장 따위가 본인과 동급이 되려 한다고 분노하였고[11], 이후 묄렌도르프가 죽을때까지 괴롭혔다.(...) 여튼 해관에서 발생한 관세 수입은 조선 총 수입의 1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환국 총판[12] 목인덕 ¶
그 외 묄렌도르프가 조선에서 얻은 주요 직위로 전환국 총판이 있다.
1883년 당시 조선은 잇다른 개화 정책의 시행으로 극도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두개의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1. 당오전을 제조한다. (친청파)
2. 차관을 얻어서 금본위제도로 전환한다. (친일파)
당연히 이홍장의 앞잡이이던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본위제로 전환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여서, 그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당장 급한불부터 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한 명판관 고종의 결단은 둘 다 한다. 따라서 300만엔 차관 얻어오라고 김옥균을 일본으로 보내는 한편[13], 당오전도 만들었다.그리고 금본위제 전환을 위해 신식 화폐 제조국을 만드니 그것이 전환국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세창양행[14]을 통해 화폐 주조기를 사오고, 서양인 기술공을 고용하여 1884년에는 시범으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환국은 묄렌도르프 실각 후 위태위태하다가 금본위제에 기반한 근대적 화폐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뒤로 하고 악화인 백동화를 발행하게 되었다.
실각 그 후 ¶
묄렌도르프가 비밀리에 체결한 조러밀약이 알려지고 나자 국제 정세가 요동쳤다. 특히 청국의 분노는 격렬하였다. 고종은 청국에 묄렌도르프가 시켜서 이렇게 됐다고 변명하고 그의 소환을 요청하여 묄렌도르프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가 맡았던 직위는 흩어지는데,
외교부 차관 - 미국인 고문 데니에게 주어졌다.
해관 총세무관 - 영국인 메릴이 임명되었으나 사실상 조선 해관 자체가 청국 해관의 산하로 편입되었다.
전환국 총판 - 묄렌도르프가 고용했던 주조 기술자 크라우스에게 주어졌다.
청에 돌아간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막료로 일하였다. 이후 데니가 제 2차 조러밀약[15]으로 위기에 몰리면서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다시 보내려고 했는데 하트가 반대하고 그 와중에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고종을 설득하여 데니가 유임되면서 무산되었다. 그 후 1901년 조선에 돌아갈 기회가 생겼으나 사망.. 그러나 이때도 하트가 건재해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 외 이야깃거리 ¶
묄렌도르프의 저택은 임오군란 당시 살해당한 민겸호의 저택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여기를 개조해서 썼는데, 당시 조선에는 호텔이 없었기에 호텔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경을 헤메던 민영익을 알렌에게 데려가 살려낸 것도 묄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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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진은 조선으로 파견되기 전, 톈진에서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당시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겨울 관복을 입고 있다.
[2] 본디 10년 계약직이었다고 한다.
[3] 2차 개항을 말한다
[4] 출발 전 이홍장이 "조선에서 국왕에게 무릎을 꿇겠느냐"고 하자 묄렌도르프는 "대인 앞도 아닌데 그렇겠습니까" 고 답했다. 물론 고종을 만나자 묄렌도르프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5] 곧 협판으로 승진. 외교부 차관
[6] 관세청장. 물론 해관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7] 양국은 청이 맺어준 조약이 일본의 조약에 비해 불리하다고 불만을 표하였다.
[8] 러시아를 끌어들여 열강을 견제한다는 계책
[9] 당시 거문도는 동양의 유용한 항구 입지로 주목받는 곳이었다.
[10] 여기에 끼어 있던 인물로 사바틴이 있다. 본디 러시아 공병 부사관 출신인 사바틴은 국내에 들어와 건축가로 대활약하였다. 주요 작품은 독립문.
[11] 하트는 조선 해관이 당연히 청국 해관 산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묄렌도르프는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12] 따지면 조폐공사장?
[13] 못 받아왔다
[14] 이름은 이렇지만 독일회사다. 묄렌도르프의 후원으로 제물포에 진출하였고, 이후 각종 근대 문물(군함도!)을 수입하는 창구가 되었다.
[15] 사람 바꿔서 두번이나 이런걸 보니 인로책이 고종의 의중이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W・R・カールズ『朝鮮風物誌』W. R. 칼스 지음, 신복룡 옮김, 조선풍물지, 집문당, 1999.
Official,Yangban goes out
高官の外出 (1)
Official,Yangban goes out
高官の外出 (2)
Selling eggs
鶏卵売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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街角の風景
Kitchen
台所
Highwayman
追いは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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妓生
George William Gilmore, 1857~?)
"the Journal of scenery in Seoul"
G・W・ギルモア『ソウル風物誌』
G. W. 길모어 지음, 신복룡 역주, 서울풍물지, 집문당,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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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露戦争の勃発とともに朝鮮を去るロシア公使パブロフ (A. I. Pavlow) の一行、左側一番後ろがサン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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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us Hamilton, Korea,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04.
NATIVE 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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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ワグナー『朝鮮の子どもたち』
E. 와그너 지음, 신복룡 역주, 한국의 아동 생활, 집문당, 1999.
Family in garden
庭園の家族
Mother and children
母親と子どもたち
Seesaw
シーソー
private school
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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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どもたちの遊び
Children wearing winter clothes
冬服の子どもたち
『申福龍教授の異邦人が見た朝鮮読み直し』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풀빛, 2002.
Namdaemun market
南大門市場
Selling candy
飴売り
Street vendors in Seoul
ソウルの露天商
イザベラ・バード御一行様
1895年の鍾路
1900年の鍾路。市電は1899年に米国資本によって開通した。
一升瓶を頭に載せて運ぶ女性
H・B・ドレイク『日本統治下の朝鮮』
H. B. Drake, Korea of the Japanese, John Lane the Bodley Head Ltd, 1930.
http://www.koreanerberlin.de/g4/bbs/board.php?bo_table=cm_old&wr_id=6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 조선 조정의 첫 서양인 고문
글쓴이 : korea 날짜 : 06-09-21 10:32 조회 : 2665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보다 상세한 연구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조만간에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첫 번째 한독간 조약이 체결되는데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독일편에서가 아니라 한국편에서 조약 체결에 관여했었다. 왜냐하면 그는 1882년말부터 1885년말까지 당시 조선 조정에서 첫 서양인 고문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제국의 인물이 중국측의 천거로 조선의 관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제국주의 시대가 극동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상을 보여 준 유일한 사례였다. 그는 한국 이름으로는 목인덕이라는 불리웠으며, 조선 관리의 복장을 착용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독립에도 헌신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폰 묄렌도르프는 1847년 2월 17일 우크마르크의 체데니크에서 태어났으며, 잘레 강변에 있는 할레에서 법학과 동양언어를 공부했다. 그는 22세에 중국의 세관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1850년대 중반부터 이 세관업무는 유럽인들이 담당해 왔었다.
그는 텐친에 머물면서 지방관이었던 리홍장을 알게 되는데, 리홍장은 당시 북부 항구들의 교역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었고 중국의 대외관계를 담당했었다. 조선이 리홍장에게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적인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요청했을 때, 리홍장은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를 적절한 인물로 천거했다. 리홍장은 이 독일인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를 희망했는데, 당시 청나라는 1882년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조정에서 외교협상과 관련한 자문과 세관업무 관련 지원을 맡았다.
묄렌도르프가 1882년 말을 타고 서울에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외국인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었다. 그는 1882년 12월 26일 고종황제를 알현했으며, 조선에 신설된 외교부서에 바로 그 날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참판직함을 갖고 세수와 항구관리 부서를 이끌었다. 이제 그는 조선의 관복을 입었으며 목참판이라고 불리웠다.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모든 중요한 외교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이미 그는 1883년 일년 전에 체결된 "조미 통상조약„의 문서를 교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조선이 독일제국,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과 통상.우호조약 등을 체결하는데 조선의 입장에 서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폰 묄렌도르프는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청나라측의 추천으로 조선에 들어왔으며, 일본을 견제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조선에 가하고 있는 위협들을 더욱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그는 긴급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 청나라가 형제국인 조선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러시아가 유일한 대안 세력이라고 판단하고 이러한 입장을 실제의 정책에 반영했다. 이는 결국 폭풍과 같은 격분을 불러 일으켰고, 청나라측에서도 그의 해고를 요구했다. 그는 조선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청나라의 의지를 과소 평가했던 것이다. 그는 1885년 7월 27일 자신의 직책에서 물러났으며, 1885년 12월 중국으로 돌아갔다.
폰 묄렌도르프는 일생 동안 조선에 관리로 다시 활동할 것으로 소망했었으나, 이러한 그의 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는 청나라의 세관업무에 다시 종사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1901년 4월 20일 닝포에서 세상을 떠났다.
http://mirror.enha.kr/wiki/%EB%AC%84%EB%A0%8C%EB%8F%84%EB%A5%B4%ED%94%84
[1]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2월 17일 ~ 1901년 4월 20일
조선에 공식으로 입국하여 외국적으로 관직을 얻은 최초의 서양인.
개화 초기 조선 최고의 실권자.
조선으로 오기까지 ¶
묄렌도르프는 체데닉(Zedenik) 지방의 귀족 후예로 태어나 할레 대학에서 언어학과 동양학을 전공하였다. 일찍이 외교관이 되고자 하여 1869년 현지 경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에 임용되겠다는 꿈을 품고 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청에서 해관에 취직하여, 5년간 지방 파견근무를 돌아다녔다. 그 동안 중국어를 익혔다.
당시 청국 해관은 로버트 하트가 세운 소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청국 해관의 수장, the Great I.G. 하트는 해관 내 전권을 휘두르고 무려 50년간 해관장의 자리는 지켰으며, 부하 직원들 위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때문에 묄렌도르프가 말단을 떠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874년 주 베이징 독일 영사관 통역관이 휴가를 떠나자 이 자리를 노리고 해관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통역관은 휴가를 떠나지 않았고, 묄렌도르프는 별정직원으로 채용되어 땜빵 통역관으로 또 파견근무를 다니게 된다. 당시 독일은 외교관을 본국에서 파견하였기 때문에, 현지 채용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묄렌도르프에도 기회가 왔으니 1879년 묄렌도르프는 톈진의 독일 영사관 영사 대리로 전근명령을 받는다. 당시 톈진은 북양 아문의 본거지로 청국 최고의 실권자 북양 대신 이홍장이 있는 곳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이홍장과 친분을 쌓게 되고, 이홍장도 묄렌도르프를 친우라 부르며 신뢰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독일 본국에서는 톈진 정식 영사를 파견, 묄렌도르프는 또 다시 통역관으로 좌천되었다(1881). 이에 묄렌도르프는 사표를 던지고 이홍장의 밑으로 들어갔지만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2]
1881년 당시 조선은 해관을 설립하고자 하고 청국에 청국인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청국인보다 서양인이 나을 것이라 하여 서양인 고문 고용을 권고하였다. 물론 개항[3]도 하지 않고 있던 조선이 이를 받아 들일 리가 없었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북양 아문은 새로 들어온 서양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준비시켰다. 조선이 서양인 파견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그 한달 후인 1882년 8월의 일이었다.
조선으로 ¶
묄렌도르프는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해관 설립을 위해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1882년 12월, 사표가 수리되고 묄렌도르프는 인천에 상륙하였다. 묄렌도르프를 맞이하기 위해 현직 병조판서가 톈진으로 갔을 정도이니 조선이 묄렌도르프에 건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일도 일이었으나 이홍장의 부하로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유지하는 임무 또한 띠고 있었다. [4]
묄렌도르프는 고종 면담후 각종 특권을 부여받고 통리아문 참의[5], 조선 해관 총세무사[6]에 임명되고, 목인덕(穆麟德)이란 이름을 썼다. 협판은 곧 참판급이었기에 조선에서 묄렌도르프는 목 참판으로 통했다. 이후 3년간의 조선 생활에서 많은 일을 하는데,
교섭통상사무아문 참판 목인덕 ¶
묄렌도르프는 새로 부임한 미국 영사를 맞이하고, 영국, 독일과의 재협상[7] 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고 프랑스, 오스트리아와도 조약 체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묄렌도르프는 본인 커리어에 치명타가 될 조약을 준비하였다. 인로책[8]의 시행자가 되어, 갑신정변 일로 일본에 사과차 가는 길에 러시아와 밀약을 맺는다. 이것이 제 1차 조러밀약이다. 이 밀약의 결과로 조선은 러시아에 영흥만(곧 원산)을 조차하고, 러시아는 조선에 장교와 부사관을 파견해 조선군 육성을 돕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에 영국이 강하게 반발하여 거문도[9] 사건을 일으키고, 이홍장도 격분하였으며 일본도 반발하였다. 결국 이 조약으로 묄렌도르프는 청국에 소환당하게 된다.
조선 해관 총세무사 목인덕 ¶
묄렌도르프는 청국 해관을 본따 조선 해관을 만들었다. 상하이에서 서양인들을 끌어 모으고 [10] 제물포, 인천, 원산에 해관을 설립해 조선 해관의 기틀을 갖추었다. 해관장으로서 묄렌도르프의 롤 모델은 하트였으며, 그를 본따 영문 직위도 I.G.(Inspector General)로 칭하였다. 물론 하트는 청국 속방의 해관장 따위가 본인과 동급이 되려 한다고 분노하였고[11], 이후 묄렌도르프가 죽을때까지 괴롭혔다.(...) 여튼 해관에서 발생한 관세 수입은 조선 총 수입의 1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환국 총판[12] 목인덕 ¶
그 외 묄렌도르프가 조선에서 얻은 주요 직위로 전환국 총판이 있다.
1883년 당시 조선은 잇다른 개화 정책의 시행으로 극도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두개의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1. 당오전을 제조한다. (친청파)
2. 차관을 얻어서 금본위제도로 전환한다. (친일파)
당연히 이홍장의 앞잡이이던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본위제로 전환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여서, 그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당장 급한불부터 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한 명판관 고종의 결단은 둘 다 한다. 따라서 300만엔 차관 얻어오라고 김옥균을 일본으로 보내는 한편[13], 당오전도 만들었다.그리고 금본위제 전환을 위해 신식 화폐 제조국을 만드니 그것이 전환국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세창양행[14]을 통해 화폐 주조기를 사오고, 서양인 기술공을 고용하여 1884년에는 시범으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환국은 묄렌도르프 실각 후 위태위태하다가 금본위제에 기반한 근대적 화폐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뒤로 하고 악화인 백동화를 발행하게 되었다.
실각 그 후 ¶
묄렌도르프가 비밀리에 체결한 조러밀약이 알려지고 나자 국제 정세가 요동쳤다. 특히 청국의 분노는 격렬하였다. 고종은 청국에 묄렌도르프가 시켜서 이렇게 됐다고 변명하고 그의 소환을 요청하여 묄렌도르프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가 맡았던 직위는 흩어지는데,
외교부 차관 - 미국인 고문 데니에게 주어졌다.
해관 총세무관 - 영국인 메릴이 임명되었으나 사실상 조선 해관 자체가 청국 해관의 산하로 편입되었다.
전환국 총판 - 묄렌도르프가 고용했던 주조 기술자 크라우스에게 주어졌다.
청에 돌아간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막료로 일하였다. 이후 데니가 제 2차 조러밀약[15]으로 위기에 몰리면서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다시 보내려고 했는데 하트가 반대하고 그 와중에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고종을 설득하여 데니가 유임되면서 무산되었다. 그 후 1901년 조선에 돌아갈 기회가 생겼으나 사망.. 그러나 이때도 하트가 건재해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 외 이야깃거리 ¶
묄렌도르프의 저택은 임오군란 당시 살해당한 민겸호의 저택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여기를 개조해서 썼는데, 당시 조선에는 호텔이 없었기에 호텔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경을 헤메던 민영익을 알렌에게 데려가 살려낸 것도 묄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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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진은 조선으로 파견되기 전, 톈진에서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당시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겨울 관복을 입고 있다.
[2] 본디 10년 계약직이었다고 한다.
[3] 2차 개항을 말한다
[4] 출발 전 이홍장이 "조선에서 국왕에게 무릎을 꿇겠느냐"고 하자 묄렌도르프는 "대인 앞도 아닌데 그렇겠습니까" 고 답했다. 물론 고종을 만나자 묄렌도르프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5] 곧 협판으로 승진. 외교부 차관
[6] 관세청장. 물론 해관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7] 양국은 청이 맺어준 조약이 일본의 조약에 비해 불리하다고 불만을 표하였다.
[8] 러시아를 끌어들여 열강을 견제한다는 계책
[9] 당시 거문도는 동양의 유용한 항구 입지로 주목받는 곳이었다.
[10] 여기에 끼어 있던 인물로 사바틴이 있다. 본디 러시아 공병 부사관 출신인 사바틴은 국내에 들어와 건축가로 대활약하였다. 주요 작품은 독립문.
[11] 하트는 조선 해관이 당연히 청국 해관 산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묄렌도르프는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12] 따지면 조폐공사장?
[13] 못 받아왔다
[14] 이름은 이렇지만 독일회사다. 묄렌도르프의 후원으로 제물포에 진출하였고, 이후 각종 근대 문물(군함도!)을 수입하는 창구가 되었다.
[15] 사람 바꿔서 두번이나 이런걸 보니 인로책이 고종의 의중이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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