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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ly 25, 2012

UN concentrate bombing to densely Korean residents aria

http://blog.livedoor.jp/hangyoreh/archives/1031198.html
[ハンギョレ21 2010.01.29第796号] 朝鮮人密集地域に爆撃集中
カテゴリハンギョレ21[週刊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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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企画]東京大空襲の時に亡くなった韓国人 推定 1万人… 2005年に調査始まり遺族確認中(1647字)
□キル・ユンヒョン

←1923年関東大地震の時の朝鮮人犠牲者と東京大空襲の時の朝鮮人犠牲者の遺骨箱(下)が保管された東京横網町の慰霊堂(上). ハンギョレ資料

1945年3月10日、日本の首都東京を火の海にした‘東京大空襲’は、韓国人には忘れられた爆撃だ。当時‘空の要塞’と呼ばれたB29爆撃機325機が動員されたこの日の空襲で亡くなった人は少なくとも8万3793人(当時、日本警視庁調査)から10万人余りに達すると推測される。これらは全て日本人だったか?

偶然に渡されたメモの朝鮮人の名前
日本の‘東京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以下 調査団)と‘東京大空襲朝鮮人犠牲者追慕会’は10万人余りの犠牲者の内10%にあたる1万人余りが朝鮮人だったと見ている。その結論に至る過程は平坦ではなかった。最近まで東京大空襲研究は日本人の被害状況に集中していただけに、犠牲者の相当数が朝鮮人であることもありうるという点までは考えが及ばなかったためだ。その当然の結果として東京大空襲により朝鮮人何人が、どこで、どのようにして亡くなり、彼らの遺骨は今どのようになっているかに対する研究はほとんどなされていなかった。
忘れられた朝鮮人犠牲者問題が注目され始めたのは、2005年10月の偶然な事件が契機となった。東京から南に287km離れた八丈島の朝鮮人強制連行実態を調査したイ・イルマン調査団事務局長は偶然に<朝日新聞>記者から東京大空襲の時に死亡した朝鮮人3人の名前が書かれたメモを渡される。死亡者の名のあるからには彼らの名簿もある筈と判断したイ事務局長は、国立中央図書館など日本の有名な図書館資料室を検索し始めた。
調査団はついに東京,千代田区の日本教育会館図書館で1974年3月美濃部亮吉(1904~1984)が東京都知事時期に作成した<戦後30年-東京都慰霊堂に眠る戦災死者>名簿を捜し出した。調査団はこの名簿の中に創氏改名はされていたが朝鮮の人の名前としか考えられない名前50人分を捜し出した。
当時、日本に強制動員されていた朝鮮人たちは軍需工場が密集した本所区(現在の墨田区),深川区,城東区(現在の江東区)等の工場寄宿舎と庶民住宅に集団居住していた。これは不幸にも米軍の爆撃が集中したところと正確に一致する。イ・イルマン事務局長は1945年9月現在、東京の朝鮮人戦災者数(4万1300人)等に基づき東京大空襲で亡くなった朝鮮人が少なくとも1万人に達するという推定値を提示した。以後、東京大空襲戦災資料センターなど日本の学界でも大部分がこの見解に従っている。

遺族招請し慰霊祭挙行
この間、南と北では被害者と遺族が一つ二つと確認されているところだ。調査団は2008年2月、韓国の‘日帝強制占領下強制動員被害真相究明委員会’の助けを受け、東京大空襲犠牲者である故ファン・スダル(死亡当時 24才)氏の子息ファン・ビョンファン(71)氏と故キム・ポンソク(死亡当時 32)氏の息女キム・クムナン(71)氏を東京に招請し質素な慰霊祭を開いた。北韓では2009年8月‘朝鮮日本軍慰安婦および強制連行被害者補償対策委員会’を通じて平安北道江界郡出身の故ソン・ジョンホ(1930~2009)氏の証言を確保することができた。イ事務局長は「ソン氏が昨年8月亡くなる直前に残した証言を通じて日帝の強制動員実態と東京大空襲当時の朝鮮人たちの被害状況をさらに明確に知ることが出来ることになるよう願う」と話した。

キル・ユンヒョン記者 ハンギョレ日帝強制占領100年特別取材チーム
原文: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6643.html 訳J.S

조선인 밀집 지역에 폭격 집중 [2010.01.29 제796호]
[기획] 도쿄 대공습 때 숨진 한국인 1만 명 추정… 2005년에야 조사 시작돼 유족 확인 중
▣ 길윤형


»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희생자들과 도쿄 대공습 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함(아래)들이 보관된 도쿄 요코아미초 위령당(위). 한겨레 자료
1945년 3월10일 일본의 수도 도쿄를 불바다로 만든 ‘도쿄 대공습’은 한국인에게는 잊혀진 폭격이다. 당시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29 폭격기가 325대나 동원된 이날 공습으로 숨진 사람은 최소 8만3793명(당시 일본 경시청 조사)에서 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었을까?
우연히 건네받은 쪽지의 조선인 이름

일본의 ‘도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과 ‘도쿄 대공습 조선인 희생자 추모모임’은 10만여 명의 희생자 가운데 10%인 1만여 명이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최근까지 도쿄 대공습 연구는 일본인의 피해 상황에 집중돼 있었을 뿐,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인일 수도 있다는 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조선인 몇 명이, 어디서, 어떻게 숨졌으며, 그들의 유골은 지금 어떻게 방치돼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잊힌 조선인 희생자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5년 10월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km 떨어진 하치조지마(八丈島)의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를 조사하던 이일만 조사단 사무국장은 우연히 <아사히신문> 기자에게서 도쿄 대공습 때 사망한 조선인 3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받는다. 사망자의 이름이 있으니 그들의 명단도 있을 것이라 판단한 이 사무국장은 국립중앙도서관 등 일본의 유명한 도서관 자료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사단은 마침내 도쿄 지요다구 일본교육회관 도서관에서 1974년 3월 미노베 료키치(1904~1984)가 도쿄 도지사 시절 작성한 <전후 30년-도쿄도 위령당에 잠든 전재사자(戰災死者)> 명부를 찾아냈다. 조사단은 이 명부 속에서 창씨개명은 됐지만 조선 사람의 이름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름 50개를 찾아냈다.

당시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군수공장이 밀집된 혼조구(지금의 스미다구), 후카가와구, 조도구(지금의 고토구) 등의 공장 기숙사와 서민 주택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불행히도 미군의 폭격이 집중된 곳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일만 사무국장은 1945년 9월 현재 도쿄의 조선인 전재자 수(4만1300명) 등에 근거해 도쿄 대공습으로 숨진 조선인이 적어도 1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치를 제시했다. 이후 도쿄 대공습 전재자료센터 등 일본 학계에서도 대부분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유족 초청해 위령제 진행

그러는 사이 남과 북에서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하나둘 확인되는 중이다. 조사단은 2008년 2월, 한국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도쿄 대공습 희생자 고 황수달(사망 당시 24살)씨의 아들 황병환(71)씨와 고 김봉석(사망 당시 32)씨의 딸 김금란(71)씨를 도쿄로 초청해 조촐한 위령제를 열었다. 북한에서는 2009년 8월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를 통해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 고 송정호(1930~2009)씨의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사무국장은 “송씨가 지난해 8월 숨지기 직전 남긴 증언을 통해 일제의 강제동원 실태와 도쿄 대공습 당시 조선인들의 피해 상황을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한겨레 일제강점 100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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