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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보물 제841호 간평일구·혼개일구(簡平日晷·渾蓋日晷)
http://simjeon.kr/xe/494502010.07.05 14:32:27 2790종로구
종목 보물 제841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소재지 국립고궁박물관
지정일 1985.08.09
수량 1기
시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고궁박물관
자료출처 및 참조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 후기에 제작된 해시계.
표면에 두 가지 시계를 새겨놓았다. 간평일구는 가로 52.2㎝, 세로 129㎝, 두께가 12.3㎝로 윗부분에, 혼개일구는 그보다 조금 더 큰 원형으로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다.
간평일구는 해시계의 문자판 지름이 43㎝ 정도이고, 아래에 있는 혼개일구의 문자판은 지름이 46㎝이다. 간평일구의 눈금은 마치 앙부일구의 오목한 내면에 그려놓은 눈금을 평면 위에 투영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혼개일구의 눈금은 중심을 옮겨가며 지름이 서로 다른 13개의 원을 그리고, 그 위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시각선(時刻線)을 그려놓았다. 전체적으로 제작솜씨가 매우 정교하다.
명문에는 “漢陽北極出地 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 時憲黃赤大距 二十三度二十九分 乾隆五十年乙巳仲秋立(한양북극출지 37도39분15초 시헌황적대거 23도 29분 건륭50년을사중추립)”이라 기록되어 있어 1785년(정조 9) 관상감(觀象監)에서 제작하였으며,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 뒤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현재 서울특별시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놓았다.
種目 宝物841号
名称 ガンピョンイルグ·ホンゲイルグ
(简平日晷·浑盖日晷)
分類 地図
数量 1期
指定日 1985.08.09
所在地 ソウル中区貞洞5-1宮中遺物展示館
市大 朝鮮正祖
所有者 国有
管理者 宮中遺物展示館
2つの日時計を一つの石に刻まれた非常にユニークな形の日時計です。ソウルの緯度37度39分15秒黄道と赤道のグクゴリ23度29分の測定に基づいて1785年に作ったと刻まれている。間平日区はアンブイルグをそのまま平面に投影したものと同じで、長さ129㎝、幅52.2㎝、厚さ12.3㎝である。日時計面径は43㎝であり、平面の円の中心を天井(天顶)と刻み時刻線の放射点を北極とセギョトヌン デ、この北極に合わせて見て上空の太陽の運行と時間を知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考案されたのだ。ホンゲ掘り起こす日時計面直径46㎝であり、2区の両方の円形の曲線で構成される縦線と横線が引かれていますが、縦線は、時間を横線は季節を示す。中針の長さは、原紙名のバンイゴ影の変化に応じて、時間を知ることができる。また、季節ごとに正午の太陽の高度が変わるので、季節線に表示される影の長さが異なることを見て二十四節気を知ることができる。この2区の日時計は時計との線が正確で洗練され、また繊細な線をくぼみ表示して石に刻まれた腕が優れている。品があり、構造がユニークなもので文化財的価値が高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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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고궁박물관] 조선시대 해시계인 앙부일구, 간평일구와 혼개일구, 신법지평일구
역사유적지/과학/기술
2010/11/06 17:54
Posted by younghwan
조선시대에는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으로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그 중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로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세종때 만들어진 정밀한 시간측정 도구인 물시계는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고, 그 일부인 자격루가 덕수궁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왕권의 상징으로 시간의 동기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시계는 시간의 근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반해 해시계는 태양의 그림자를 가지고 시간과 절기를 측정할 수 있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시계이다.
고궁박물관에는 세종때 만들어진 오목해시계인 앙부일구(보물845호)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간평해시계와 혼개해시계 (간평일구와 혼개일구, 보물 841호), 평면해시계(신법지평일구, 보물 840호)를 비롯하여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조선시대에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해시계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문과 역법, 시간과 관련된 사항은 국왕의 권위와 연결되는 중요한 사항으로 궁궐과 중앙관청인 관상감에서 간여한 사항으로 중앙박물관보다는 고궁박물관에 제일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목해시계 (앙부일구, 보물 845호). 청동으로 만든 반구 안에 은선을 박아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개의 계절선으로 나타내고 수직으로 시각선을 그었다. 세종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조선시대 해시계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것은 대궐과 종로 등에 설치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공동시계의 성격을 갖는다.
경복궁 편전인 사정전 앞에는 복제품이지만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해시계가 설치되어 사용되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출처:문화재청>
평면해시계 (숭정9년명신법지평일구, 보물 839호). 중국 명나라때 선교사에 의해 중국 명나라의 북경을 기준으로 제작한 해시계이다. 1645년경 소현세자에 의해 도입되어 관상감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장구 모양으로 선을 새겨 세로선은 시각, 가로선은 24절기를 나타내고 있다.
이 해시계 중앙에 삼각형의 시표를 꽂았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다.
대부분의 해시계가 반원모양인데 비해 이 해시계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는 면인 시반(時盤)이 수평을 이루고 있어 지평일구(地平日晷)란 이름이 붙었다. 전체가 흰 대리석으로 가로 120.3㎝, 세로 57.5㎝, 두께 16.5㎝이고 무게가 310㎏이나 된다. 시반면은 잘 연마된 평면으로 그 위에 시각선과 절기선이 매우 조밀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시각선은 한시간을 4각(角)으로 나누고 1각마다 시각선을 하나씩 그어 오전 5시45분부터 오후 6시15분까지 알 수 있게 하였다. 절기선은 하지에서 동지까지 13개선으로 이루어 졌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가운데 삼각형의 시표(時表)가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인조 14년(1636) 시헌력법에 의해 이천경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시계가 만들어진 표준 위도를 계산했는데 30°54′N으로 중국 북경의 위도와 같아, 이 지평일구는 북경을 관측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1645년 우리나라에 돌아오면서 그 일행이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평면해시계 (신법지평일구, 보물 840호)이 해시계는 조선 숙종때 만들어진 것으로 기존의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해시계의 일종으로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가로 58.9㎝, 세로 38.2㎝, 두께 16.3㎝이다. 원리는 그래프 용지에 1㎝ 간격으로 동심원과 10°간격의 방사선을 그어놓고, 그 중심에 막대를 세워 시각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보는 형태로, 이것은 반구형을 한 해시계 앙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에 옮겨 놓은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측면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고 구조와 평면에 그려진 시각선, 절기를 나타낸 선이 중국의 것과 같아 그것을 본 떠 관상감(觀象監)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이들 신법지평일구와 같은 휴대용 해시계가 있다. 가로 16.8㎝, 세로 12.4㎝ 크기의 놋쇠로 만든 이 해시계는 자석으로 된 침이 들어 있어서, 휴대할 때 남북을 정하여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했다. 현재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간평해시계와 혼개해시계 (간평일구와 혼개일구, 보물 841호). 조선 정조때 만들어진 것으로 간평해시계와 혼개해시계가 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의 북경을 기준으로 만든 평면해시계를 보완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해시계에 그려진 시간과 절기를 표시한 선. 세로줄이 시각선이고 가로줄이 24절기선이라고 한다.
북극을 중심으로 둥글게 선을 새긴 해시계와 남극을 중심으로 둥글게 새겨 날금과 씨금을 나타낸 해시계를 나란히 두었다. 간평해시계의 세로줄은 시각선이고, 가로줄은 24절기선이다. 서울의 표준위도를 적어 놓고 있다. 혼천해시계의 좌우로 벌어져 가는 선은 시각선이고 중앙에 있는 수직선 밑은 남쪽을 가리키며 시간상으로는 정오를 뜻한다. <출처:고궁박물관>
2개의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긴 매우 독특한 형태의 해시계이다. 서울의 위도 37도 39분 15초와 황도와 적도의 극거리 23도 29분을 측정기준으로 하여 1785년에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간평일구는 앙부일구를 그대로 수평면 위에 투영한 것과 같으며 길이 129㎝, 넓이 52.2㎝, 두께 12.3㎝이다. 해시계 면의 지름은 43㎝이며, 평면 원의 중심을 천정(天頂)이라 새기고 시각선의 복사점을 북극이라 새겼는데, 이 북극에 맞춰 보아 상공의 태양운행과 시간을 알 수 있게 고안한 것이다. 혼개일구는 해시계 면의 지름 46㎝이며 2구 모두 원안에 곡선으로 이루어진 세로선과 가로선들이 그어져 있는데, 세로선은 시간을 가로선은 계절을 나타낸다. 가운데 바늘의 길이는 원지름의 반이고 그림자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정오에 태양의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이 2구의 해시계는 시계면의 선들이 정확하고 정교하며 또 섬세한 선들을 음각하여 돌에 새긴 솜씨가 뛰어나다. 품위가 있고 구조가 독특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출처:문화재청>
중국 북경 자금성 정전인 태화전 앞에 있는 해시계
평면해시계 (19세기). 삼각형의 영의 그림자가 원판 위에 드리워지면 그림자의 끝이 가리키는 지점으로 시간을 읽을 수 있다.
대표적인 공동해시계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룩소르 신전 앞에 있는 오벨리스크이다.
http://planewalk.egloos.com/1913434
http://ask.nate.com/qna/view.html?n=8804010
우리 나라 해시계의 종류는?
glass010 | 08.12.19 08:22
답변 1
조회 496
네티즌공감
장영실이 발명한 우리 나라 최초의 시계 해시계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해시계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태그우리나라최초의시계해시계 해시계의종류 우리나라해시계의종류 한국해시계의종류 해시계 한국의해시계 한국해시계 장영실 장영실해시계 장영실해시계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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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how 님의 답변
08.12.19 09:09
답변공감
가장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의 최초의 해시계 앙부일부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보물 제 845호로 지정되었있고 장영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요
세종 16년 1434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시계입니다.
이 앙부 일구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 만들어졌고
그리고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는 원리를 이용하여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를 보며
24절기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간평일구·혼개일구가 있습니다.
이 해시계는 독특하게 2개의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긴 시계인데요
1785년에 만들어 져
현재 보물 제 841호로 되었다고 하네요
간평일구는 129㎝, 넓이 52.2㎝, 두께 12.3㎝로
상공의 태양운행과 시간을 알 수 있게 고안한 것이라고 하고요
혼개일구는 절기마다 정오에 태양의 고도가 달라지는 자연 현상을 이용해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수있게끔 고안되었습니다.
천평일구입니다.
천평일구는 세종 19년 1437년에 만들어 졌다고 하네요
이 천평일구의 용기둥에에서 남쪽 못까지 연결된 실이 하늘의 적도면과 일치하도록 하여
시반면 중앙을 수직으로 통과하게끔 설치 되어있는데요
햇 빛의 의해 비춰진 실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알수있게끔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현주일구입니다.
현주일구 또 한 세종 19년 1437년에 만들어 졌는데요
현주일구는 위 아래를 잇는 줄을 설치하여 추를 달아 팽팽하기게 당기도록 설치 하였는데요
이 줄의 그림자를 시반에 나타나게하여 그 눈금을 보고 시간을 알수있게끔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정남일구 입니다.
정남일구 역시 세종 19년에 제작 되었는데요
이 정남일구는 현주일구와 천평일구의 특징을 함께 하는 아주 정밀한 시계입니다.
정남일구의 부에는 원지와 수거가 있어서 정확한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수 있도록 고안된 시계입니다.
http://ameblo.jp/iitai01/entry-10146417354.html
日帝の残虐な拷問器具
2008-10-02 15:47:16
Theme: 韓国・実史
前回のプログで少々間違いがありました。
>独立記念館に展示(所蔵?)してある日帝時代の笞刑台。実際は、日本の日時計だったというオチ。
日本の日時計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朝鮮の日時計でした。
訂正して再び大笑いしてしまいました。
独立記念館のリンクも生きている様で
Detail Info
http://www.i815.or.kr/HomepageJP/vrin/detail_info.php?admin_id=5-000376-000
http://www.geocities.jp/salonianlib/history1/execution_story.html
笞刑台
収集方法:複製
資料番号:000376
収蔵位置:3展示館
数量:1
類型:武具類 / 形具類
時代:日帝強占時代
キーワード:朝鮮笞刑令 笞刑
hidokei2
韓日韓刑罰比較考国人の抗日意識を完全に奪い取る目的で、1912年5月8日に「朝鮮笞刑令」を公布し、韓国人に対しひどい笞刑を行った。その時に使用された笞刑台である。日本は、韓国を強制的に併合し、陸海軍大将を朝鮮総督に任命して、武断統治を実施した。各級官公署の官吏たちと、学校の教師にまで制服を着させ、刀をつけさせる強圧的な武断統治を行い、韓国を支配した。
一部拡大
hidokei3
日韓刑罰比較考より
http://www.geocities.co.jp/Playtown-Yoyo/6813/history1/execution_story.html
夏至・春分・立春・夏至........
ここでEnjoyKoreaより転載
韓国 宮 旅行記 - 景福宮に行く(3)
http://enjoykorea.jp/tbbs/read.php?board_id=ptravel&nid=63714
hidokei4
事情前(思政殿)の後には世宗大王が作った日時計を見られる. 日時計は韓国唯一の立体時計だ.
どう見ても日時計です。
本当の李朝の笞刑はこれ(日本併合時ではありません)
cikei
この笞刑は、全羅南道・順天市・楽安面にある楽安邑城民俗村で体験できる様です。
cikei2
ある意味、一度独立記念館を見に行ってみたくなりました。
世宗大王が作った日時計=笞刑台
民族村で体験できる刑罰(李朝時代のもの)=日帝の拷問
現場で笑ってしまうと顰蹙どころかぶん殴られるかもね。
日本の高校生、もしこのプログを見てから修学旅行に行くのなら確かめてくれないか?
くれぐれも爆笑などせぬように。
他、参考サイト
EnjoyKorea 前略 獨立記念館さま 間違ってませんか?(それも2年以上前からw)
http://bbs.enjoykorea.jp/tbbs/read.php?board_id=phistory&nid=96014
EnjoyKorea ■笞刑 ( ´H`)y-~~ nominally 君に言い訳の奇怪(ママ)を。w
http://bbs.enjoykorea.jp/tbbs/read.php?board_id=thistory&nid=1875918
韓国観光情報:独立記念館
http://www.geocities.com/asianneighbors/zDokuritsu/
拷問の厳しさは李朝朝鮮の遺風
http://www5b.biglobe.ne.jp/~korea-su/korea-su/jkorea/nikkan/goumon.html
拷問の厳しさは李朝朝鮮の遺風
天安の独立記念館へ行くと、日本時代の拷問風景の蝋人形がある。そのすさまじさは、日本時代がいかに暗黒時代であったか、見学に来た多くの人にアッピールしている。
又ロンドンデーリーミラーの記者、マッケンジーはその著書『朝鮮の悲劇』に、義兵運動の激しかった1906年、二つの監獄を視察し、そのすさまじさを伝え、伊藤博文統監がこのような実態に何らの改善をしないと非難しているている。その一部を左記に示す。
地上に縛り付けられている3人の男がそこにいた。彼らの首と足は台柱にくくりつけられ、手は縛り合わされていた。部屋には明かりもなく通風窓もなかった。ただ僅かに壁に開けられた小さな穴があるだけであった。彼らの背には笞打ちで裂かれた恐ろしい傷跡があり、その手はきつく縛り付けた縄の為、所々骨が見えるほどに肉が裂けていた。そしてそれらの傷跡は、全く膿み放題になっていた。手足の上部は腫れ上がり、笞跡と水ぶくれができていた。1人の男の目はふさがっていて視力を失っており、まぶたからはたくさんの膿がたれ出ていた。多分両眼を笞でひっぱたかれたのであろう。男たちは終日動くこともなしに、こうして監禁されたままなのである。私は彼らを日の当たる場所に連れ出した。それは難しい作業であった。彼らのうちの1人は四肢が萎えてしまっていて、既に殆ど身体を動かすことが出来なくなっていた。彼らはみんな飢え衰えて、なにかを嘆願したり抗議したりする気力も失ってしまっていた。そこは私のこれまでに見た限りでの地獄への一歩手前であった。
しかし、これは伊藤が赴任してからわずか一年も経たない頃であり、日本人顧問団もまだ極めて少ない時期であった。
朝鮮の拷問の激しさについてシャルル・ダレは、1866年ソウルで処刑されたダブリュイ主教の手紙を中心に次のように報告している。
「許されている拷問が、未だ数多く残っている。次に主要なものを挙げてみよう。(詳細省略)
1.棍杖(長さ1.6-2メートル、幅20センチ、太さ4.5センチ位の棍杖で殴る)
2.平棒、笞、棒杖
3.骨の脱臼と屈折(3種類ある。その内の1例は、両膝と両足の親指を縛り、その間に2本の棒を入れ、反対方向に引っ張る)
4.吊り拷問
5.鋸拷問或いは足の鋸引き
6.3稜杖(木製の斧若しくは鉞で肉片を切開する拷問」
つまり天安の独立記念館で展示されている拷問の風景は、李朝朝鮮時代の拷問風景なのである。
1906年統監府が設置されたとき、韓国では既に「裁判所構成法」が制定されており、外形上は整っていたが、実質は行政官が殆ど司法官を兼務しており、司法と行政は一体であった。伊藤統監は韓国法部、主要裁判所に日本人参与、法務補佐官を各一名雇用させ、司法事務の指導に当たらせた。第三次日韓協約、韓国併合と日本の関与が強まると共に司法は独立し、裁判制度が整備された。
この法務補佐官として韓国に赴任した長浜三郎は、拷問の残酷さを見て「未開幼稚の時代には何国も拷問の蛮法はあったろう。我が国も昔時は口供完結を持って罪を論ずという時代もあったが、彼のボアソナード博士が「拷問とボアソナードは両立せず」と絶叫し、遂に廃止せられてから既に30余年にもなる。それが今一衣帯水のこの国に来りこの残酷を目睹するに至っては豈に驚かざるを得むのだ」と述べている。赴任して5ヶ月後「法務補佐官会議」が開催され、その結果拷問廃止を骨子とする法律が制定され、韓国で初めて拷問がなくなる事になったのである。*1
監獄の改善もこの時期に始まった。それまで殆どなかった刑務作業の拡充に努め、出所後の社会復帰の機会の増加を図った。又僧侶、牧師をして、教誨の任に当たらせると共に、無教育であった受刑者に読み書き、算盤を教えた。入所当時無教育であった受刑者が、獄中から父母に書簡を送り、不幸を謝り、父母を感激させた例も少なくなかった。*2
朝鮮の刑罰規定で異色のものは笞刑である。朝鮮では五刑の一つとして広く適用されていたが、1912年「朝鮮笞刑令」として正式に採用された。この対象は朝鮮人の16歳から60歳までの男子に限られ、刑1日又は罰金1円が笞1に計算された。1日笞30までとし、笞で尻を打つものであった。執行方法が容易なこと、行刑費が節約となること、犯罪の予防上効果のあること等から残されたが、斉藤実総督時、キリスト教宣教師(米人)の強い要望により廃止された。*3
次に李朝朝鮮の取り調べ、裁判のでたらめな例を2例挙げる。
シャルル・ダレ 「ある日1人の若い常民が、両班の子弟と喧嘩している内に、誤って斧で脇腹を一撃して殺してしまった。殺人犯である常民は、即座に捕らえられ守令の前に連行された。証人の中には被害者の父親もいた。一言二言三言訊問した後、守令は斧を持ってこさせてその父親に手渡し、縛られたまま地面に倒れている殺害者を指さしながら、「こやつが、どのようにお前の息子を打ち殺したか、見せてみよ」と言った。守令はその父親に犯人をその場で殺害させ、煩わしいこの事件から早く逃れてしまいたかったのだ。」
マッケンジー 国王のロシア大使館逃避後の出来事として。「第2の詔勅が天下に公布され、兵士たちに自分たちの国王を守り、謀反の首謀者たちの首をはねて国王の所にそれを持参するよう呼びかけた。この詔勅は集まった群衆の怒りを最高潮にかきたてた。大群衆が前閣僚たちを殺害しようと捜し求めた。2人の大臣(前内閣総理大臣金弘集と前農商工部大臣鄭秉夏の2人)が街路に引きずり出され、残忍きわまる方法で殺害された。その内1人は首の後ろから耳の前にまでわたるひどい深傷を負っていたが、群衆はその彼が倒れるとき猛獣のような大きな歓声を張り上げた。群衆はその死体に向かって石を投げつけ、或いは踏みつけ、又或ものはその四肢をずたずたに切り裂いた。1人の男は自分の小刀を抜きはなって、死体の一つの内股の肉を切り取り、その肉片を自分の口に入れながら、群衆に向かって「さあ!奴らを食おうではないか」と叫んだ。」
日本はこのような前近代的な制度を廃止し、近代的な裁判制度を取り入れた。その典型的な例は、伊藤博文の暗殺事件に対する対応である。伊藤博文は韓国統監の前に、日本の首相を何回も歴任した、近代日本創設の最大の功労者である。この伊藤がハルピンで暗殺されたのである。当然日本の民衆は激高した。前述の金弘集首相の例から見て、朝鮮では即刻死刑となったであろう。しかし日本は彼を「義士」として扱い、二人の弁護士を付け、安重根の法廷闘争を援助したのである。さらに監獄で出される食事は上等の白米で、果物・茶までつき、さっぱりした衣類の支給、入浴もあった。*4
朝鮮人判事は併合当初、民事では原告・被告共に朝鮮人の場合、刑事では被告が朝鮮人の場合のみ担当できたが、1920年の改正により、日本人判事と法令上も、実務面からも一切の差別はなくなった。*5
脚注
*1 『法政 二〇〇〇年六月号』「法政大学の歴史三一 韓国統監府に於ける法政大学出身の法務補 佐官」巻末
*2 『日本人の海外活動に関する歴史的調査朝鮮篇第二分冊』一六九-一七一頁
*3 日本人の海外活動に関する歴史的調査朝鮮篇第二分冊』一五〇-一五一頁
『斉藤実伝』
*4 日韓二〇〇〇年の真実
*5 日本人の海外活動に関する歴史的調査朝鮮篇第二分冊』一三二-一四二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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