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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ly 2, 2012

the inventions by Jang Yeong-sil

Armillary sphere and Sun dial
蒋英実 蔣英實 장영실 しょう・えいじつ チャン・ヨンシル Jang Yeong-sil
1390年頃 - 1450年頃
大王世宗 テワンセジョン 대왕세종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6202


역사 속 장영실은 <대왕세종>의 장영실과 다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장영실, 어느 왕이 발굴했을까?
08.03.28 15:22 ㅣ최종 업데이트 08.03.28 15:32 김종성 (qqqkim2000)
대왕세종, 이방원, 태종, 대왕 세종, 장영실

▲ 장영실. 드라마 <대왕세종>.
ⓒ KBS
장영실
<대왕세종>의 황당한 설정 중 하나로 천재 과학기술자 장영실의 행적을 들 수 있다. 드라마 속 장영실은 상전인 한영로의 딸 다연으로부터 위험한 사랑을 받는다. 또 그는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해서 무기 제조를 담당한다. 그 무기가 충녕대군까지 겨누다니!

드라마 속 장영실의 행적도 위험천만하지만, <대왕세종> 작가의 상상력 또한 상당히 위험천만한 편이다. 아무리 관련 기록이 적다고 해도 최소한의 개연성을 바탕으로 해야 할 텐데, <대왕세종>에서는 그런 개연성이 이미 오래 전에 실종된 듯하다.

비록 동래현 소속의 관노였다고 해도 그 정도의 천재였다면, 상전의 딸이 정말로 위험한 사랑을 선택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관노와 결혼함으로써 생기는 불이익보다는 천재와 결혼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너무 계산적인 발상일까? 아무튼 다연과 영실의 사랑은 얼마든지 개연성 있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왕세종>, 역사 속 장영실 제대로 표현 못해

하지만, <대왕세종>은 그것을 제외하고는 역사 속의 장영실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관련 기록이 너무 적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적은 돈을 밑천으로 큰돈을 만드는 것이 유능한 상인이듯이, 한정된 자료 속에서도 중요한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것이 유능한 역사학자나 역사작가다.

냉혹하게 말하면, <대왕세종>은 장영실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영실에 관한 주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물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몇몇 군데에서 중요한 왜곡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알고 행한 왜곡이든, 모르고 행한 왜곡이든 간에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장영실과 관련하여 <대왕세종>이 범하고 있는 왜곡 중에서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하나는 장영실의 내면세계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장영실의 외면세계에 관한 것이다.

첫째, 장영실의 내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왜곡

관련 기록이 매우 적기 때문에 장영실의 내면세계는 추론의 방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추론에도 일정한 법칙은 있어야 한다. 추론의 과정과 결론이 자연과 인간의 보편타당한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만약 보편적 법칙이 아닌 특수한 법칙을 취하고자 한다면, 왜 그런 예외를 선택했는지 그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장영실의 내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묘사는 바로 이 점에서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 장영실 등이 만든 자격루(물시계)를 개량한 중종 때의 보루각 자격루. 서울 덕수궁 소재.
ⓒ 김종성
자격루
드라마 속의 장영실은 이미 반정부 혹은 반체제에 가담해 버렸다. 게다가 그가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제공한 무기가 충녕대군을 겨누기까지 했다.

"노비 출신이니까 사회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천재적인 노비였으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조선사회의 전복을 꿈꾸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당시 조선사회가 건국 초기였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국 초기는 일반 평민들에게는 '기회의 시대'가 될 수 있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나 치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가난한 농민 출신들이 재벌 혹은 대기업가로 성장한 사례가 많이 나타난 시기가 대한민국 건국 30년 이내였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이 채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층 농민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신분이 세습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난다.

장영실이 살았던 시대도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시기였다.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때였다. 실제로 태종 이방원 시기에는 미천한 관노들이 능력을 바탕으로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간 사례가 많았다. 평양 관노 김인(金忍)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영실은 굳이 반정부 혹은 반체제를 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펼칠 수가 있었다.

장영실이 반정부 세력에 가담? 상식밖 설정

건국 초기에 반정부나 반체제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전 시대의 특권층이거나 혹은 지식인 계층이다. 천민이나 평민에게는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건국 초기의 조선체제가 막 무너진 고려체제보다 더 진보적인 점을 고려할 때에, 조선체제에 대한 평민 혹은 천민들의 인식은 저항심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장영실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인재에 목마른 신왕조는 장영실의 출신성분보다는 그의 능력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조건 속에서 장영실이 체제에 친화하지 않고 체제에 저항하는 사고를 했을 것이라는 설정을 내놓으려면, 그 근거가 될 최소한의 사례라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영실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혈통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중국 강남 출신의 귀화인과 한민족 출신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귀화인들은 현지 사회의 주류문화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기 마련이다. 귀화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은 주로 현지 사회의 제도권이다. 귀화 1세대가 현지 사회의 반체제를 동경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일이다.

장영실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영실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면, 그가 조선 체제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하는 내면세계를 지녔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그가 살았던 시기가 건국 초기의 혼란한 기회의 시대였고 또 그가 현지문화를 지향하는 귀화인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 장영실이 고려황실 잔존세력 같은 저항조직에 가담했다는 설정을 내놓으려면 뭔가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둘째, 장영실의 외면세계에 관한 <대왕세종>의 왜곡

<대왕세종>에서는 양녕의 폐위가 임박하고 태종의 양위가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가담하는 장영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장영실은 태종때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평양 관노 김인과 마찬가지로 장영실 역시 태종이 스카우트한 과학기술자였다.

장영실은 태종이 보호하던 사람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자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출중했기 때문에 태종이 그를 특별히 보호했다고 한다.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한 태종이 그를 궁궐에 불러들인 것이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주·항주지역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

흔히 장영실 하면 세종 임금이 떠오르지만, 장영실의 재능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임금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 장영실을 발탁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대왕세종>.
ⓒ KBS
이방원
<대왕세종>이 장영실과 조선왕실의 만남을 계속 늦추는 것은 다분히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를 과대평가한 데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영실과 이방원의 관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했다면, 태종의 양위가 임박한 상황 하에서도 장영실이 '밖'으로 나도는 상황을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 픽션 <대왕세종>은 조선 초기의 천재적 과학기술자 장영실과 관련하여 몇 가지의 왜곡을 범하고 있다. 그가 반정부 혹은 반체제 성향을 지녔을 것이라는 설정이 그러하고, 태종의 양위가 임박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태종을 만나지 못한 채 저항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귀화인 2세로서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면서 현지 사회인 조선의 주류문화를 동경하는 장영실. 그런 장영실을 전격 발탁한 태종 이방원.

인재가 절실히 필요한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국왕이 관노를 특별히 발탁하는 그런 예외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영실의 이미지와 그가 처한 상황은 그러했다고 보아야 한다.

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tp





http://bakong.tistory.com/96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과학 르네상스를 이뤄냈던 세종시대, 그 한가운데에는 기생의 아들로 천한 관비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있었습니다. “장영실의 아비는 고려 말 원나라 때 소주(蘇州) 항주(杭州)에서 온 중국 사람이며 어머니는 기생이다.”라고 실록에 전해지는데요.

동래 관비로 있던 1400년 태종이 각 지방의 관찰사들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하여 중용을 시키고자 실시한 도천법이라는 제도를 통해 장영실은 궁궐 기술자로 대궐로 들어와 그동안 목말라했던 수많은 선진 기술들을 접하며 갈증을 해소하게 됩니다. 이러한 장영실의 능력을 알고 그의 노비신분을 벗어나게 해준 이가 바로 세종이었으며 장영실은 이런 세종과 조선을 위해 그의 모든 역량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위인전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달리 장영실은 발명가이기보단 뛰어난 금속전문가였습니다. 세종과 다른 과학자들이 설계한 기구들은 장영실의 뛰어난 손재주와 금속에 대한 지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죠.


이렇게 세종과 이천 등을 중심으로 장영실의 기술력이 결합하여 조선은 자격루와 천문기기인 간의 그리고 간의를 발전시킨 혼천의 등 최고의 발명품을 보유하게 됩니다.




1423년 상의원 별좌를 거쳐 1432년 호군(護軍), 1437년에는 오늘날의 중장에 해당하는 종3품 대호군(大護軍)에 이르게 되니 세종의 장영실에 대한 총애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대호군이 된 지 5년 뒤 장영실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파직을 당하고 맙니다.


1442년 3월, 세종의 온천행에 사용될 안여(安輿) 제작의 감독을 장영실은 같은 대호군이었던 조순생과 함께 맡는데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안여제작은 조순생이 담당하였고 장영실은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인데 가마의 견고함을 문제 삼은 장영실의 말을 무시한 조순생의 과오로 가마는 시험운전 때 그만 무너지고 마는데요.


이 사건으로 함께 감독한 선공 직장 임효돈과 녹사 최효남, 대호군 조순생등과 함께 의금부로 끌려간 장영실은 불경죄로 곤장 1백대에서 20대가 감형된 80대를 맞고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제 책임자였던 조순생만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빼앗겼던 직첩을 복권시켰다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 이상한 점은 장영실이 파직 당한지 이듬해에 세종과 장영실의 역작인 천문관측대 간의대를 헐어버리라 명령을 내린 것인데요. 이점을 토대로 장영실의 파직사유를 유추해봅니다.






앞선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천문학 또는 역법은 황제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으로 명나라를 무시하고 조선만의 역법을 갖는 것 자체가 조선의 입장에선 자주의 상징이었지만 명에게는 일종의 반역이었으니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가 있었던 부분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아마 이즈음 조선의 이러한 움직임을 명나라가 포착한 듯 보이며 간의대를 없애려 한 것도 이 때문 있듯 합니다.

따라서 간의대의 존재가 밝혀지면 그것을 만든 장영실의 목숨 또한 보존할 수 없었기에 그를 "안여파손사건"에 연루시켜 파직한 시킨 것은 세종이 장영실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가 아니었을까요? <어떤오후>

http://dramatique.textcube.com/171

과학자 장영실(1편)
우리고장의 인물 - 장영실(1편)

과학자 장영실 2편 바로가기 http://dramatique.textcube.com/171


장영실은 세계에 그의 과학적인 유산을 남긴 우리의 역사적인 과학자 이다.
그의 고향은 지금의 부산 동래이다.
당시에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큰 동래부에 거주하는 인물로서 미천한 신분이었다.

세종실록 의 가록에서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의 소주(쑤저우)·항주(항저우)사람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고 한다.

장영실이 동래현 아전시절에 그의 기술이 뛰어남을 태종이 알고 발탁 하였다 고 되어 있다.


아산 장씨 종친회에서는 출생은 1390(공양왕 2년)이라고 하며.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장서(아산 장씨 시조)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 되었다고 말한다.


자영실이 만들어 그 기술적인 업적을 지금도 인정하는 그의 유품들을 현대 과학으로 하나씩 고찰해 보기로 한다.




그는 현대적인 논문을 쓰거나 지금의 학위같은 인증을 받은것은 아니지만 오직 그의 우수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작된 실물이 존재함으로서 그의 과학은 우수하게 인정받고 있다.

장영실의 유품 첫번채 - 측우기.


측우기가 필요했던 국가적인 시기였을것이며 그 이유는 현대 국가적인 지방 조세나 건설및 강우의 실질적인 계절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종때의 조세 활당을 근거에 의해 흉작인지 풍년인지를 추정하려했다고 생각된다.(작황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조세부과-부당)

강우지역을 파악해서 토지의 등급을 정하여 조세를 부과하려 했다.
(옥토나 페토를 균등 세금부과-불공평)
실록근거:매년 봄만 되면 가뭄에 시달림-년간-계절간 과학적인 데이터를 확보하려 했다.
국가적인사업(토지측량, 호구조사, 축성사업 에 근거를 이용하려함).

공신력이 있는 측우기로 전국의 지방행정망을 통해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강우량을 측정하려함.
세종 7년(1425년) - 전국 현에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정도를 조사하여 보고케 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조정이 전국의 강우량에 관심을 가지지만 아마도 보고가 정확하지 몯했을것으로 보며 조정에서도 보고내용에 신빙성을 느낄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세종조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일설에는 장영실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만약 장영실이 직접 제작한것이 아니라 할지라도,당시 장영실이 이미 세종조에서 과학적인 전문 부서를 운영했다면 그 때 만들어지는 모든 휘하의 작품은 장영실의 작품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6179358


장영실 제작, 조선시대의 자격루 복원?
zxcvjkl | 07.11.22 08:48
답변 1
조회 255

네티즌공감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의 최고의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의 자격루가 복원이 되어졌다고 하는데요.
이 자격루란 어떤 곳에 쓰여지는 것인가요?
그리고 복원이된 자격루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인지도 궁금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세요
태그장영실 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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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님의 답변
08.09.1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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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이 재위 16년(1434)에 장영실(蔣英實)등에게 명해 제작한 첨단 시계의 일종인 보루각(報漏閣) 자격루(自擊漏)를 복원하는사업이 완료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21일 오전 박물관에서 남문현 교수가 이끄는 건국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완성한 자격루 복원품을 공개했다. 이번 복원품의 모델은 현존하는 유일한 자격루 실물로 중종 31년(1536)에 제작한 덕수궁 소재 자격루(국보 제229호). 남 교수팀은 원형 실측작업, 국내외 관련 문헌 조사와 고증작업, 그리고 3차에 걸친 세미나 개최 성과 등을 토대로 복원품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복원 자격루는 물을 일정하게 흘려보내는 항아리인 수수호(受水壺), 흘러온 물을 받는 항아리인 파수호(播水壺), 12시(十二時)마다 종을 울리는 장치인 시기(時機), 1경(一更. 오후 7시 무렵) 이후 5경(五更. 오전 3시 무렵)까지 북과 징을 울리도록 하는 장치인 경점시보기구 등으로 이뤄졌다.

자격루 복원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람이 가능





http://scentkisti.tistory.com/8




최근 주말 저녁에 드라마 ‘대왕 세종’이 방영 중이다. 흔히 세종대왕을 한글을 창제한 왕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정도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당시 장영실과 같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글 : 박응서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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